환갑 맞은 우리나라 공연예술계의 산 증인 '국립극장'
환갑 맞은 우리나라 공연예술계의 산 증인 '국립극장'
  • 이은영 기자
  • 승인 2010.05.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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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국립극장 60년의 발자취

 

아시아 최초, 대한민국 유일의 국립공연장인 국립극장이 1950년 4월 29일 창립 이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고비마다 국민과 함께 호흡하고 보듬으며 파란의 길을 걸어온 지 어느덧 반세기를 넘었다. 척박한 우리나라 공연예술계의 순수예술 장르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더 나아가 해외 무대에 우리의 얼과 혼을 담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이겠다는 의지와 정열이 환갑을 넘은 나이에 오히려 더 불타오르고 있다. 이에 본지는 미래의 60년을 준비하며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국립극장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태동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모국어를 되찾게 된 연극인들은 열악했던 예술 활동에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국립극장 설립운동을 전개, 이는 1948년 8월 국립극장 창설에 대한 대통령령 공표로 이어진다.

 

▲국립극장 개관 기념작 <원술랑>의 공연 모습

 

1949년 10월 21일 국립극장 운영위원회가 조직되고 초대극장장에 유치진(柳致眞, 1905-1974)이 임명된다. 국립극장의 장소는 서울 중구 태평로에 위치한 부민관(現 서울시의회 의사당 건물)으로 정해지고, 1950년 1월 극장의 직속 협의기구인 <신극협의회>를 설치, 산하에 <신협>과 <극협>이라는 두 극단을 창단한다.

‘민족연극예술의 정립과 창조’라는 기치에 맞춰 올린 개관 기념공연 <원술랑>(유치진 작)이 초연 당시 약 5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해 신극 사상 최대 관객동원의 기록을 남겼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제3회 공연 <청춘의 윤리>를 준비 과정에서 6.25 발발,  개관 57일 만에 문을 닫게 된다.

전시(戰時) 중에 부산과 대구로 피난 온 예술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대구의 문화극장(이후 키네마극장)을 기반으로 공연활동을 벌였고, 1952년 5월 국립극장 재건을 위한 재정 법률안이 국회와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대구문화극장을 국립극장 건물로 사용한다.

 

▲대구 시절 국립극장의 모습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환도한 후 국립극장은 부지문제로 그대로 대구에 남아있었다. 결국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1957년 1월 5일 정부에 국립극장 환도 촉진 건의문을 제출하고, 문교부 당국은 적극적으로 환도를 추진, 시공관(市公館) 건물을 서울시와 공동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1957년 6월 1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 둥지를 튼다.

◈제2의 탄생

1961년 11월 서울 시민회관이 개관하게 된다. 이로써 시공관을 극장전용 건물로 사용하게 된 국립극장은 모델링을 통해 기존의 1,000석 이상의 객석을 800여석으로 축소하고 무대를 이전보다 1/3확장하는 한편, 오케스트라 박스 신설, 회전식 무대 및 자동 조명시설 등을 설치해 예술극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명동 국립극장 당시의 모습

 

1962년 3월 새롭게 단장한 명동 국립극장 개관식에 맞춰 전속단체로 활동해오던 극단 <신협>과 <민극>은 재편성, <국립극단>이란 명칭으로 발족하고, 국립국극단(국립창극단의 전신), 국립무용단, 국립오페라단이 새로 창단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향악단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국립극장은 1969년 기존 ‘KBS교향악단’의 명맥을 그대로 인수, 그 운영권을 이어받아 3관 편성 90여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국립교향악단>으로 개칭하고 소속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남산 시대 개막 그리고 2010 재도약의 해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정부에서는 남산을 중심으로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 계획>을 발표한다.

 

▲남산 국립극장 준공 당시의 모습

 

가장 먼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양성소(국립국악고등학교의 전신)가 1967년 12월 준공된다. 이 건물은 현재 별오름극장의 전신이 된다. 1973년 8월 국립극장이 완성되면서 바야흐로 남산 시대를 맞는다.

1973년 5월 국립합창단이 전속단체로 창설되고, 국립무용단은 이분화돼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나뉜다. 이 시기 국립극장 산하에는 최대 8개의 전속단체가 운영되다가 1977년 10월 국립가무단이  <시립가무단>으로 바뀐다.

1981년 8월 국립교향악단은 한국방송공사(KBS)로 다시 운영권이 이관되고, 1995년 국립관현악단이 창단된다.

1999년 1월 29일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공포(법률 제5711호)됨에 따라 국립극장은 2000년 1월 1일부터 책임운영기관이 된다. 전속단체로 있던 국립발레단과 오페라단, 합창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하고 4개 단체(국립극단,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가 국립극장 소속으로 운영된다.

2009년 1월 1일부터는 책임운영기관 제4기를 맞이하면서 정오의 음악회, 국립극장 고고고, 국가브랜드공연, 청소년공연예술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등 예술성과 생산성, 국내외 교류협력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국립극장 전경

 

더불어 올해 5월 6일 국립극장 설립 6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의 숙원사업인 공연예술박물관의 전관 개관과 함께 <전관개관 기념 특별전-6.25전쟁, 공연예술의 기억과 흔적>을 진행했으며, 국가 브랜드 공연 <청(淸)>을 선보였다.

앞으로 국립극장은 그 동안의 공적을 되짚어보는 <국립극장 60년사> 편찬사업과 함께 공연예술박물관 전시장에서 상시 관람할 수 있는 <국립극장 60년> 영상다큐멘터리를 제작해 국립극장 60주년을 기점으로 국립극장의 정체성을 재확인, 세계와 공유하는 국립극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재도약의 계기를 확고히 다지고 있다.

 

▲지난 6일 열렸던 공연예술박물관 전관 개관 기념 테이프 커팅 행사 모습

 

◈국립극단_이 시대의 진정한 ‘연극 사관학교’

국립극단은 창단 당시 <신협>이란 명칭을 달고 출범했다. 국립극장 산하 극단 <신협>과 <극협> 중 먼저 <신협>만 가동하기로 해서 4월 말에 개관, 공연작으로 <원술랑>을 무대에 올렸고, 큰 성공을 거둔다.

 

▲신극협의회 창립 준비 토의 모습. 1950년 1월 국립극장장실

 

하지만 <신협>은 출범 2개월 만에 6·25전쟁을 겪으며 국립극장으로부터 분리됐고, 7년여의 공백동안 사설단체로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1957년에 정식으로 국립극단이 탄생할 때도 우여곡절은 많았다. 특히, 당시 연극계를 이끌었던 두 지도자 유치진과 서항석의 갈등이 국립극단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 극단 발전에 지장을 줬다.

결국 <신협>과 <민극>이라는 두 전속단체를 두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으며, 이들이 다시 합쳐져서 국립극단으로 재탄생한 것은 2년여 뒤인 1961년 12월 1일이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국립극단은 한국 연극의 굳건한 중심축으로서, 그 지향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남산드라마센터 개관과 더불어 소위 동인제 시스템의 여러 사설극단들이 등장함에 따라 경쟁적으로 공연활동을 벌였지만, 국립극단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고전과 신작을 조화시키면서 관립극단다운 의연함을 보여줬다.

국립극단은 1970년대 장충동 신축극장으로 이전한 뒤에도 ‘창작극을 기조로 민족극의 기반을 다진다’는 각오로 차범석을 비롯한 김의경, 한노단, 하유상, 노경식, 오태석, 이재현등 우리나라 희곡계를 이끄는 중견 소장 극작가들의 신작 발표무대를 만들어 주는 일을 계속했다.

극단 출범부터 국립극단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로 구성돼 오늘날 한국 연극을 이끌고 있는 주요 배우들 중에서는 국립극단을 거치지 않은 인물이 없을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평한다. 국립극단은 고전극의  산실이자 창작극의 발표무대였으며, 연출과 연기, 무대미술의 교본을 만들어내는 ‘연극 사관학교’ 였다.

◈국립창극단_창극의 위상을 확보하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 국립극장 전속단체로 창단되면서 인멸 위기에 놓인 창극이 보존·전승되는 계기가 됐다. 국립국극단은 명동에 상주하면서, 판소리를 기반으로 20세기 전반 하나의 장르를 이룬 창극공연의 전통을 이어가는 매개체가 된다.

 

▲완창판소리, 왕기석의 박봉술제 적벽가(2008)

 

1970년 국립창극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정체성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판소리를 재료로 다양한 춤과 음악을 함께 들려주는 음악극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당대의 명창들이 모여 뛰어난 소리와 너름새로 판을 휘어잡으며, 판소리와는 구분되는 장르의 예술로 그 위상을 확보해 나갔다.

국립창극단은 김연수 선생 시절부터 1970년대까지는 1930년대식 창극의 전통과 맥락을 함께하는 작품을 주로 해왔다. 그러던 중 이진순 선생, 허규 선생 등의 창극 연출작업  참여로 창극이 연극적, 마당극적 요소를 갖추면서 양식화를 실험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의 창극은 이 두 사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다양한 무대가 연출됐다.

창극이 음악극적 가능성 측면에서 접근해 일정한 아우라를 형성한 것은 김홍승과 정갑균 등  오페라를 포함한 음악극 연출가가 참여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완판 창극’ 이라는 이름으로 여섯 시간 동안 공연되는 <춘향전>은 2000년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다.

어려움 속에서도 국립창극단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전통적인 판소리를 무대화한 전통창극을 다수 공연해왔고, 새로운 창극대본으로 만든  창작창극을 작품화하는 성취를 거뒀다. 특히 국립창극단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은  ‘완창판소리’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립무용단_변신은 계속된다

1962년 2월 6일, 서울 소공동 중앙공보관에 13명의 무용수가 모였다. 국립극장 전속단체로 국립무용단이 창단되는 순간이었다. 첫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최소 단원으로 시작해 생활 보장이 되지 않았고,  연습을 위한 피아니스트는 물론 창작부도 없었다.

 

▲국립무용단 <춤 춘향> 공연 모습

 

국립무용단은 1962년 설립 이후 1969년까지 발레 중심의 공연이었다. 이는 초대 단장이  발레 전공자인 임성남이었기 때문이다. 1회 공연 <백(白)의 환상>, <영(靈)은 살아있다>,  <쌍곡선>은 촉박한 일정과 창작 무용음악의 부재로 실패했다. 2회 공연 역시 드라마틱 발레를 표방한 <검은 태양>과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된 무용시 <사신(死神)의 독백>이 관객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이후 국립극장은 장충동에 새로 터를 잡았고, 이와 더불어 국립무용단은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국립무용단은 발레적인 무용극에서 탈피해 송범 단장의 주도로 변신을 꾀했다.

1974년에는 무용계 중진들이 대거 충원돼 최정상의 무용수들이 포진한 무용단으로 거듭났으며, 1985년 송범 안무의 <도미부인>이 LA올림픽 아트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선정, 국립무용단 최초의 고정레퍼토리가 됐다.

조흥동 단장과 최현 예술감독 체제를 거쳐 국수호 단장 체제에 이르러 국립무용단은 88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무용의 세계화에 자신감을 얻었고, 무용극이란 용어를 춤극으로 바꾸면서 열린 춤 작업을 시도했다.

2000년 배정혜 단장 체제로 새롭게 정비된 무용단은 책임경영 체제로 새 출발했다. <4인 4색, 나흘간의 춤 이야기> 공연은 국립무용단 창단 38년 만에 처음으로 유료 관객 비율이 80%를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올해 국립무용단은 캐나다와 미국에서 <춤 춘향> 공연으로 시작했다. 이는 창단 이래 ‘국립’이라는 이름으로 성사된 첫 미주공연이었다.

현재 가족용 레퍼토리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국립무용단은 5월 콩쥐와 신데렐라를 접목한 <프린세스 콩쥐>를 공연, 어린이무용극을 레퍼토리화한다. 국립극장 60주년 개관과 함께 탄생한 가족용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_국악과 양악의 경계를 넘어서라!

1994년 국립극장 산하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관련한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창극단과 무용단의 공연 완성도를 위해 전속 반주단이 필요하다는 목적에서 창단을 준비했다. 하지만 초대단장 박범훈은 단순한 반주단이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국악관현악단 설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청중과의 교감에 큰 공헌을 한 <대화가 있는 무대-사랑방음악회> 포스터

1995년 1월 악단이 창단됐고, 초대단장 겸 지휘자인 박범훈은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기 편성과 배치를 기존의 국악관현악단과 달리했고, 대중에게 친근한 민속음악풍의  레퍼토리를 직접 작·편곡하고, 지휘했다. 기존 국악관현악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중적인  음악을 연주해 연일 화제가 됐다.

 

이후, 한상일, 최상화로 이어지는 10년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초기 청사진을 벗어나지 않았다. 민속음악적인 요소를 국악관현악으로 재해석해 악·가·무 통합 공연의 가능성을 추구했고, 북한의 현대화된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한상일 단장은 한민족이 다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의 발견과 한국적인 노래문화 정착에 뜻을 둔 <겨레의 노래뎐>을, 최상화 단장은 <엄마와 함께 하는 국악보따리>를 기획했다. 이 작품들은 현재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황병기 예술감독은 창단 10년을 맞아 부임하면서 과거 대규모 무대를 지향하는 것에서 탈피, 음악 그 자체와 청중과의 소통에 초점을 둔 기획으로 정기연주회, 기획연주회, 기획공연으로 구분했다. 황 감독이 이끄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최대 관심사는 청중과의 교감이다. <대화가 있는 무대-사랑방음악회> 신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