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 선 히로히토
거울 앞에 선 히로히토
  • 김우종 (전덕성여대 교수, 문학평론가)
  • 승인 2010.05.2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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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국화는 일본 왕실 문장

제1연 제2연에선 그냥 국화꽃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제4연에서는 '노오란 꽃잎'이라고 색깔을 밝혔다.

일본 왕실 문장紋章이 노오란 황국이기 때문에 이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려는 저의가 있는 것이다. '메이지 천황' 때부터 특히 황국을 그들의 문장으로 애용하더니 그가 죽은 후 그를 신으로 모신 메이지 신궁의 도리이(대문 같은 것) 이마에는 노오란 국화 문장이 붙여졌다.

문장기법에는 강조법이 있다. 첫째 둘째 연까지는 그냥 국화라 하고 마지막에 노오란 국화라고 색깔을 말했으면 그것은 전형적인 강조법이다. 국화 색을 분명히 알려주는 강조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 시의 끝 연에 해당한다. 마지막에 가서 분명하게 일왕 히로히토라는 것을 다짐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색중에서 오직 황색을 선택하고 그 색을 끝 연에서 특히 강조법으로 사용한 의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는 서정주 고향의 300억 송이 황국 축제를 비롯해서 온 나라에 전염병처럼 노오란 색이 번져 가는 추세지만 친일파를 찬미하는 문인들이 이렇게 설치기 전까지는 황국 세상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화투짝이 있고 9월 국화가 노랑이지만 그것도 일본인이 만든 것이며, 들판에서 우리를 반기는 들국화는 대개 보랏빛이고 흰색도 많다.

그러므로 '친일파 처단하자' 소리가 미 군정 정책으로 억지로 입이 봉해진 상태일 때 가장 적극적이던 친일문인이 그냥 국화도 아닌 황국을 강조한 것은 일왕 찬미를 노골적으로 밝히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ㅁ. 왜 끝 연이 '무서리'인가?

무서리 내린뒤의 국화

그리고 제3연은 전쟁의 진행 과정을 더욱 확실하게 설명한 것이다. 왜냐면 그 전쟁은 마지막의 원폭 투하로 개끗하게 결론이 난 것이니까. 서정주가 마지막 연에서 무서리가 내렸다고 한 것도 이처럼 전쟁 진행과 결말을 정확하게 순서대로 말하며 스토리의 대단원을 장식한 것이다.

제3연

ㄱ. 거울 앞에 선 히로히토 裕仁

제3연은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화끈한 연애질로 젊은 시절 다 보내고 귀향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베일에 가려진 밑그림은 일왕 히로히토다. 실제로 거울 앞에 선 것이다. 화장을 하려고 선 것은 아니다. 40년대 한국 여인이 화장을 하려면 방바닥에 주저앉아야지 서서 하지는 않 는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국화 옆에서>의 제3연은 시로 쓴 소설이다. 시도 이야기를 담으면 더 인기가 높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이 젊은 날의 정열적인 사랑의 기쁨과 슬픔과 오랜 방황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뜨거운 사랑으로 청춘의 세월을 보낸 추억을 갖고 싶을 것이다. 특히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결혼 후 집구석에서 부엌데기노릇 여편네 노릇만 해 온 과거의 여인들이라면 이런 시를 통한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자기도 실컷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연애'를 간접적으로 해 보고 한을 풀고 싶은 보상심리가 많았을 것 같다.

시 속의 여인은 고향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오랜 방황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고 이젠 그리운 고향에 돌아 온 여인이다. 눈가에 살짝 주름이 지고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 그렇지만 예전보다 더 아름다움의 깊이가 있다. 오랜 세월 겪어 온 시련으로 전에는 없었던 내면적 성숙함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옆에는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는 한 남자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내 누님이라고 했으니 남자 동생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야위고 수척해진 모습을 동정하면서도 다른 모든 풀잎 들이 푸르죽죽하게 다 죽어 자빠진 뒤에 홀로 고고하게 피어 있는 국화꽃처럼 더 아름다워졌다고 찬미한다.

그런데 제1연 2연 4연이 모두 일본 왕이 전쟁 저지르고 끝낸 다음의 모습을 그린 것이듯이 3연도 그가 전쟁 저지르고 끝낸 다음의 이야기가 된다.

이 시를 바로 읽으려면 패전 당시의 일본왕의 모습과 그들의 건국신화를 상상해 봐야 한다. 일본왕 히로히토는 항복 후 맥아더 장군을 예방했었다. 이때 맥아더는 후줄근한 군복차림으로 예복 차림의 히로히토를 맞아 주었다. 참담하게 일본왕실 가문 망신을 주고 나라를 망친 모습이다.

일본을 이렇게 망쳐 놓았으면 히로히토는 그 다음에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을까?

ㄴ. 거울 앞에 선 아마데라스오미카미

그 다음 순서는 당연히 조상 앞에 나가서 그 사실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도 결혼하면 사당의 조상께 고하고, 과거 급제처럼 크게 출세해도 고하고, 집안을 망쳐 놓았어도 조상께 고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다. 그처럼 일본 왕 히로히토는 1924년 결혼식 때 조상에게 고하기 위해 그 앞에 나갔었고 1926년 즉위식 때도 그랬었다.

그것은 그의 조상 아마데라스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신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식을 거행하는 것이며 그곳에는 그 조상을 상징하는 신기神器 거울이 있다. 아마데라스오미카미가 캄캄한 동굴에서 나올 때 들고 있던 거울(야다노가가미)이다.(삽화 참조) 다른 신들이 동굴입구에 걸어두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아마데라스오미가미가 거울 앞에 섰을 때 해가 반사되어 온 세상이 밝아졌다는 건국신화 때문에 일본기도 해 그림이 되고 때로는 햇살이 퍼지는 문양도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