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례사
나의 주례사
  • 이종열(수필가)
  • 승인 2010.05.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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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경북 청도 출생
2006년 6월 《에세이플러스》 등단
수필집 《주황색 향기》로 제3회 계간문예 수필문학상 수상(2009년)
결혼의 계절이 왔다. 다시는 주례를 안 맡는다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떠맡고 보면 주례사가 걱정이다. 내용도 문제지만 어눌한 언변에 제스처와 미소를 배합하고 거기에 시간까지 맞춰야 하는 등 신경 쓸 일이 적은 게 아니다.

나는 주례를 맡으면 예비부부를 미리 만나 그들의 사정과 희망을 듣는다. 주례사는 정중하면서도 참신하되 흥미를 모아야 한다. 간간히 유머나 위트를 섞어 신랑신부를 신나게 띄워야한다. 문단에는 작가를 무작정 칭찬하는 평론을 비아냥대는 ‘주례사비평’이라는 말도 있다. 주로 결혼생활에 대한 도움말로 구성되지만 “아이를 둘 이상 낳아라.”와 “그 아이를 뒷바라지 할 만큼 부자가 되라”는 말은 내가 빼먹지 않는 단골메뉴다.

주례사는 한 번 읽히고 나면 사라진다. 결혼한 부부에게 물어보니 주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49%)이 기억하는 사람(42%)보다 많았다. 나 자신도 결혼할 때 들은 주례사를 몇 가지만 기억할 뿐이다. 나는 주례사를 새겨듣기가 쉽지 않은 신랑신부를 위해 직접 서명한 주례사 원고를 성혼선언문에 끼워서 전해준다.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예배당 결혼이 생겼고 점차 결혼식장이 다양해지자 성직자 대신 주례가 생겼다. 주례가 생기니 주례사가 생겼다. 서양에서도 주례가 있고, 우리 전통혼례에도 집례가 있기는 하나 그것은 사회에 가까울 뿐, 주례가 장문의 주례사를 들려주는 것은 우리만의 특유한 풍경이다.

결혼식이 엄숙일변도에서 축제로 밝아짐에 발맞춰 주례문화도 변하는 것 같다. 인터넷에는 한국주례연합회, 결혼주례협회와 같은 주례전문조직이 성업 중이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 혼인서약을 하고 “오늘 신랑 아무개와 신부 누구는 결혼했습니다.”라며 성혼선언을 하는 주례 없는 결혼식도 봤다.

주례사는 결혼식의 여러 순서 중 가장 긴 시간을 배정받는다. 주례사에 소요된 평균시간이 17분이라는 통계가 있다하나 내 경우에는 7-8분으로 잡는다. 이 시간은 신랑신부에게는 새 출발의 축복과 마음속에 새길 메시지를 받는 시간이지만, 하객도 각자의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든 때나 건강할 때나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자주 듣는 이 말은 16세기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에 있는 말이다. 주례사를 하다보면 자연히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주례사는 출발하는 신랑신부를 향한 축복과 당부의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다짐하는 나를 향한 주례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