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의 등불로 세상을 밝힌다
시(詩)의 등불로 세상을 밝힌다
  • 박기훈 / 성열한 기자
  • 승인 2010.05.28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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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시 전문 박물관, 현대시박물관

[서울문화투데이= 박기훈, 성열한 기자] 현대시의 시작이 한 세기가 지났다. 이는 우리의 정신사가 100년이 됐다는 얘기이자 예술사가 100년이 됐다는 얘기다. 이러한 점에서 시는 그 민족 생활사의 반영이고 예술사의 꽃이다. 하지만 100년의 세월동안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현대시박물관은 우리 현대시 100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한국의 정신·예술사의 미래를 가늠해보게 해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지나온 100년과 다가올 100년

현대시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 백 년 동안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이상, 김영랑, 윤동주, 임화, 서정주 등과 같은 주옥같은 시인들의 시가 우리들에게 읽혀지고 사랑받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으며 오로지 글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2층 건물의 현대시박물관의 입구

이러한 상황에서 빈자일등(貧者一燈), 어두운 세상을 조금이나마 시의 등불로 밝혀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뜻과 정성이 모며 ‘현대시박물관’을 문을 열게 된다. 1908년 11월 1일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후 꼭 백년이 지난 2008년 11월 1일이었다.

그동안 특정 시인의 이름이나 지역의 지명을 간판으로 한 문학관은 전국에 수 십 여개가 존재했지만, 오로지 시를 전문으로 한 박물관은 현대시박물관이 최초이다.

젊음의 거리에서 과거를 만나다

현대시박물관은 의외로 젊은이들이 붐비는 대학로 혜화 로터리 부근에 위치해 있다. 출판사와 연구소를 운영해오던 김재홍 관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곳으로, 2층짜리 한옥을 리모델링해 11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

▲수 많은 시집들이 보관되어 있는 현대시박물관의 모습

사옥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이기 때문에 박물관의 각 전시실은 독특한 구조로 이어져있다. 거실이 하나의 전시공간이 되고 계단을 오르면서도 전시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모습을 한 조각품들과 여러 화분이 어우러져있는 마루가 보인다. 1층의 ‘만해 생애 도자화(陶磁畵)실’에서 김천정 화백의 독특한 도자화를 볼 수 있다.

현대시박물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현대시 100년 시집실’에는 수많은 시집들이 자리해 있다. 이중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희귀시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의 <진달래꽃>, <청록집>과 같은 시집들의 원본 초판본과 <문학예술>, <현대문학>, <사상계>, <시와 경제> 같은 동인지·문예지의 창간호 등이 그것이다.
 
시집 전시실의 바로 옆에 있는 ‘현대시인 초상시화실’에는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어렴풋이 봤던 현대시를 대표하는 주요시인 100인의 초상시화가 전시돼 있다.

▲조정래 시인의 시구가 쓰여져 있는 부채가 전시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시의 숲’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마련되어있다. 고은, 신경림, 김지하, 정희성 등 시인들의 육필원고가 수많은 족자에 붙어 빽빽하게 걸려있는 모습이 이름그대로 숲에 온 기분이다. 

2층에 올라서면 ‘시인 휘호·서예 병풍실’ 과 ‘명시·명화 시화실’이 자리하고 있다. 1억원을 호가한다는 고은 시인의 시가 담긴 12폭의 병풍 원본이 눈에 들어온다. 이밖에도 변시지 화백과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이만익 화백과 한용운 시인의 <천송>등의 멋진 시화도 감상할 수 있다.

이밖에 ‘주요시인 초상사진실’에는 지금은 작고해 다시 볼 수 없는 옛 시인들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연구 자료실’과 ‘석박사학위 논문실’에서는 시에 관심이 많은 전공자들이나 시인들의 교류도 이뤄지기도 한다.

현대시박물관은 200여점의 초상시화, 200여점의 시인들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비롯해 육필원고와 휘호들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희귀본을 포함한 15,000여권의 시집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6.25전쟁 통에 사라지고, 어려웠던 시절 고물로도 팔리며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것들을 40여년간 교수 생활을 하며 하나하나 모아 온 김재홍 관장의 노력 때문이다.

그의 열정이 녹아 있는 현대시박물관은 더 이상 그의 사적인 공간이 아닌 시의 혼으로 가득 찬, 우리가 소중히 지켜나가야 할 대한민국 정신의 보물창고이다. 

 

시는 문화의 혼이자 인간의 혼

모든 상상력의 근원인 시의 핵심은 무에서 존재를 이끌어 내는 창조정신이다. 문화의 혼은 시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혼은 문화다. 따라서 시가 없이 인간사회는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시는 상업적인 면이 거의 배제되어 있어 현실적으로 필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인 창조적인 힘, 변화하는 힘이 바로 시 정신이다. 김재홍 관장은 바로 이점에 주목한다.

“혁명가는 대게 시인들이 많아요.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하기 때문이죠. 한 시대를 이끈 영웅호걸이나 발명가, 예술가들 대부분은 시인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뒤집어 보기 혹은 거꾸로 보기이며, 이는 새롭게 보기이자 자유롭게 보기이죠. 바로 그 점에서 시 정신이 인류변화에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해요”

정신적 유물의 파수꾼

문화재하면 머릿속에 뭐가 떠오르는가. 일반적으로 석굴암, 다보탑, 숭례문 등 유형적인 문화재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유형문화재들의 보전은 소리 높여 외치지만 문학, 특히 시에 대해선 교과서에서만 읊조릴 뿐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정신적 유산은 더욱 빛나는, 평생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는 문화유산이다.

“시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문화재죠. 이건 세계에 소개할 수 있는 정신인거예요.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한번 보세요. 변역이 어려워서 그렇지 우리나라만큼 높은 수준의 명시를 가진 나라는 많지 않아요”

꺼져가는 우리나라 혼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발로 이리저리 뛰어온 김재홍 관장은 <님의 침묵> 원본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냈다.

“1981년에 <한용운 문학연구>로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였어요. 당시 서울대에서 박사를 같이 한 일본인이 우리나라에서 <님의 침묵> 원본을 구했더라고요. 사정사정해서 빌려와서는 안 돌려줬어요(웃음). 그랬더니 매일 아침에 찾아오더라고요. 할 수 없이 내놨더니 일본으로 들고 가버렸어요. 우리의 문화재가 없어진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어려운 살림이지만 비싼 돈을 들여서라도 이러한 문화재들을 모으고 보존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박물관, 삶의 질을 높여주는 문화기관

정신적 문화재를 보전하고 관리한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는 김 관장은 자신이 보유한 시집들이 많은 대학(원)생들의 연구 자료로 활용되는 것을 또 다른 보람으로 꼽는다.

“원본과 시중의 유통본은 차이가 많아요. 시인들의 띄어쓰기나 개인 시어(詩語)의 잘못된 해석에서 오는 사례가 많기에 실제 원본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 ‘하늘에는 성근별’이라는 구절이 있죠? 원본에는 섞은별로 나와있어요. 큰 별, 작은 별, 여러 가지 색의 별들이 하늘에 섞여있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못 쓴 거로 여겨서 성근별로 바꿔서 출판한 거예요. 성근별은 말 그대로 드물다는 뜻이거든요. 완전히 뜻이 달라지죠. 이게 바로 연구자들에게 원본이 꼭 필요한 이유죠”

더불어 아이들의 현장학습 장소로도 인기가 많은 현대시박물관은 최근 얼마 전까지 특별한 전시를 열었었다. 찾아가는 박물관 운동의 일환으로 숙명여대에서 열렸던 <한국 현대시 100년, 대표 시인전>이 바로 그것이다.

“숙명여대 박물관에서 여기 전시품 일부를 가져가서 개최했었죠. 앞으로는 지방 대학 및 언론사들과 서로 협조해서 찾아가는 박물관 운동을 문화소외지역으로 확장할 계획이예요.”
김재홍 관장은 이와 더불어 7, 80년대 시인 초상화전, 초상시화 200인전, 국내 최고(崔古) 계간 시집인 <시와 시학> 창간 20주년 특별 시화전 등 ‘박물관의 생활화’를 위한 전시를 계획 중에 있다.

“문화라는 것은 지식과 자격이 있는, 누릴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이곳은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서 만든 일종의 문화 기관이죠. 좀 더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이야기도 나누고 제가 수백차례 시에 관한 특강을 했던 영상들도 보면서 교양을 높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의 전시공간인 시의 숲

시는 문화품격 상승의 도구

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감정이 복받쳐 쓴 옛날시와 의도적으로 쓰려고 노력하는 현대시다. 김재홍 관장은 축구와 야구에 비유하며 말을 이어갔다.

“옛날시가 축구라면 현대시는 야구죠. 축구는 누구나 쉽게 보고 이해할 수 있죠. 하지만 야구는 어느 정도 룰을 알아야 이해가 가능하죠. 하지만 기본적인 몇 개만 알고 나면 정말 재미있는 게 야구죠. 마찬가지예요. 현대시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기초적인 것만 알면 쉽게 해석될 수 있는 재미있는 문학이 될 수 있어요”

김 관장은 사람들이 시라 하면 어렵게 생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은 교육자와 우리들 둘 다의 잘못이라고 한다.

“어떻게 좀 더 쉽게 요령 있게 전달하느냐가 교사나 비평가들의 책무라고 생각해요. 독자들도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약간의 노력이 더 필요하죠. 이렇게 양쪽이 서로 다가갈 때 우리나라 문화의 품격이 높아지게 되는 거죠”

“시는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깨친 것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와 같다”는 김 관장은 누구보다 시의 생활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지하철 스크린 도어에서 시를 볼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제가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시 특강 강사를 여러 번 했어요. 그때 우린 문화 운동이 너무 부족하다며 지하철에서 시를 볼 수 있도록 하자고 제창했어요. 당시 서울시 문화국장이 그 상의를 듣고는 제안이 와서 하게 된 거죠”

그는 이러한 활동들이 매우 중요하다며 한강과 세느강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한강이 세느강보다 더 근사하지만 세계인들은 세느강을 더 많이 알죠. 그 원초적인 이유는 기욤 아폴리네르(G. Apollinaire)라는 좋은 시인이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프랑스 파리를 갈 때 그 시인이 지은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한번쯤 읽어보고 가는 이들이 많아요. 예술이 세느강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거죠”

마지막으로 시를 잘 쓰고 싶어 머리를 쥐어짜는 이들을 위한 시 잘 쓰는 비법을 전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쉽게 표현하면서 깊은 뜻을 담는 것이 시를 잘 쓰는 방법이죠. 무엇이든 너무 어렵게 얘기하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오히려 독자와 자신을 멀어지게 할 뿐이죠”

인터뷰 박기훈 기자/ 사진 성열한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