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열정으로 예술혼 담긴 조형언어 표현한다
뜨거운 열정으로 예술혼 담긴 조형언어 표현한다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6.0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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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家)자 소리 들으려면 작품에 철학이 있어야”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 남의 것을 따라하지 않는 창조적인 사람. 정상의 자리에서도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가꾸는 동시에 냉철하게 비판할 줄 아는 사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사람이 되길 꿈꾼다. 이는 ‘제정자(73) 화백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6월 초, ‘버선 작가’로 유명한 제 화백를 만나기 위해 분당의 자택으로 향했다. 그 날의 날씨만큼이나 싱싱한 20대의 ‘젊은 끼’를 간직한 그와의 인터뷰는 유쾌·상쾌·통쾌 그 자체였다.

◈무한한 버선의 울림

예술가는 계속 변신해야 한다.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때부터 예술이 아니다. 그러기에 항상 고민해야 한다. 제정자 화백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변신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생각한 것이 우리나라 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다짐하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소재가 우리나라 고유의 버선이다.

“우리나라는 선이 참 아름답잖아요? 산이나 여인의 옷깃처럼 부드러운 선이 유명하죠. 그런데 버선은 더 아름답고 섹시하기까지 하더라고요(웃음). 게다가 버선이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크잖아요. 못생긴 발도 다 아름답게 감싸주는 너그러운 어머니의 품 같기도 하죠. 사실 제 작품속의 버선은 단순히 신는 버선이 아닌 어머니를 상징하는 그런 버선이에요. 하나의 작은 우주와도 같다고나 할까요”

버선으로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제 화백은 자칫 우리 고유의 것이 촌스럽게 표현될까봐 많은 걱정을 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어느 날 LA 아트페어에 1주일을 다녀오게 된다. 발이 부르트도록 몇 바퀴씩 돌며 관람해 본 결과 ‘할 만 하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이 자신이 자란 지역의 정서와 문화를 표현했더라고요. 내가 생각한 게 옳았다는 것에 자신감을 얻었죠. 그리고 제가 구상한 것보다 못한 것 같은 작품들이 찬사를 받는 걸 보곤 ‘내 것이 더 아름다운데 왜 못하겠어’라는 생각도 들었죠”

자신감을 갖고 귀국한 그녀는 직접 고급 실크천을 이용해 버선을 만들었다. 수실까지 단 아름다운 버선을 작품에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입체를 추구하기 위해 캔버스 전체에 버선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캔버스에 조화롭게 정렬되어 있는 버선들마다 작은 네모 칸들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도 그녀의 숨은 의도가 들어있다.

“창이예요 창. 아파트로 생각하면 각 집인 거죠. 관객과의 소통 창구라고 할까요? 또, 조형적으로 보면 옷의 매듭처럼 작품의 화룡정점을 찍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고요”

제 화백의 집 곳곳엔 버선 모양의 조각품들이 눈에 띈다. 이 역시 그녀의 작품이다. 버선을 붙이는 것을 통해 나오는 입체감으로도 모자라 직접 조각에까지 손을 뻗었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이를 보고 “하얀 버선발이란 말이 있듯이 대리석에 의한 버선의 입체화는 그 메스가 나타내는 탄력과 더불어 우아한 실체로서의 자신을 부상시키고 있다. 그것은 어느덧 버선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순수한 조형들로서 그 어떤 것에도 대위시킬 수 없는 하나의 존재감을 획득해보이고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제정자 화백의 버선 대리석 조각

 “계속 성에 안차고 만족을 못하니까 대리석으로 조각까지 하게 됐죠. 버선 조각을 마친 날엔 흥분이 돼서 잠도 못 이뤘어요. 내 작품이 조각영역까지 갈 수 있구나하는 그 흥분감과 함께 완벽한 입체감을 표현했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아서 말이죠. 그래서 지금도 계속 저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녀의 작품을 소장한 이들은 한 결 같이 작품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속된 말로 ‘좋아  미친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다. 자신의 작품 속에 깃들어있는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감동받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녀의 행복 또한 점점 더 커가고 있다.

“전시회 때마다 어머니 생각난다고 눈시울을 적시는 분들이 계셔요. 외국에서 전시회할 때는 교민 분들이 오프닝에 와서 보시고는 고향의 향수 때문에 눈물을 글썽거리시더라고요. 정말 가슴이 뭉클했어요”

◈대담함, 열정과 만나다

제정자 화백의 요즘 작품들은 대담하다. 원색의 블루와 레드를 보고 있으면 그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좀 두려웠죠. 하지만 세계적으로 컬러시대이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시도해봤죠. 반응이 좋더라고요. 작가는 현대감각을 무시하면 안돼요. 자신이 좋은 것만 평생 그것만 할 수 없죠”

블루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싱싱한 감을 줘 좋아한다는 제 화백은 요즘 들어 레드에 푹 빠져있다.

“예전에는 유치하다 생각하고 전반적으로 잘 안 썼어요. 요즘에는 외출할 때 블랙패션에 레드로 핸드백이나 액세서리를 세팅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또 다른 의미에서 제정자 화백의 작품은 대담하다. 바로 그 크기다. 그녀의 작품들은 소작(小作)이 아닌 120호 이상의 대작(大作)들이 많다.

이러한 대작들에 대해 일부에선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한다. 첫째로 쓸 데 없는 물자 낭비요, 둘째로 자기만족일 뿐이요, 셋째로 큰 작품에 대한 부당한 대가 요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자기과시적인 예술가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무조건 옳다고 동의 할 순 없는 문제이다. 그녀는 “현대미술, 그것도 비구상에선 대작을 많이 해야한다”고 설명한다.

“대작을 함으로 인해서 그 작가의 역량을 알 수 있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표현할 수도 있고요. 그래야 자신의 마음에 들죠. 물론, 소작이 가치가 없다는 얘긴 아니죠. 하지만 적어도 비구상 쪽에서는 대부분 저와 같은 생각일거에요. 소장에 대해 염려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오히려 미술관 같은 곳에선 대작을 더 선호하죠”

사실 그녀는 몇 년 전에 위 수술을 했었다. 그럼에도 당시 한 달만 요양한 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작품에만 몰두하고 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주로 집에만 있으면서 작업을 한다는 그녀는 정말 레드의 열정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작품하면서 가끔 ‘내가 죽으려고 건강도 생각안하고 작품을 열정적으로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걸 어떡해요. 시간가는게 너무 아까워요”

◈식을 줄 모르는 미술혼

제정자 화백은 동양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세월의 소리’ 연작으로 일찌감치 많은 이들의 극찬을 받으며 신세계미술관, 조선화랑, 선화랑, 힐튼 아트 갤러리 등 당시 모든 미술인의 꿈이었던 전시관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개최했다.

▲정(靜)·동(動)옐로우 / 194x260 / Cotten & Acrylic on Canvas

“작가는 좋은 작품으로 좋은 선배님들에게 칭찬받으면 더할 나위 없죠. 용기도 나고요. 사실 누구나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 헤매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자신감을 주니 신나서 더욱 저를 발전시킬 수 있었죠”
하지만 여러 번 전시회를 하면서 안타까운 기억이 있다고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한번은 독일 사업가가 제 작품을 보고는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더니 가진 돈이 300불밖에 없는데 팔면 안되겠냐고 하는 거예요. 정말 제 그림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알았던 거죠. 그 가격에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초대전이었던 터라 할 수 없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사실 그림도 모르는 사람이 돈 있다고 사가지고 위치도 맞지 않게 걸어놓는 건 솔직히 싫어요”

앞으로 인사동 그림손 화랑 개관 2주년 기념 초대전(10월 15일~29일), 숭례문 복원 기금 전시(9월) 등을 계획 중인 제정자 화백은 8일 ‘Preview & VIP Reception’을 시작으로 9일~13일까지 양재동 aT센터에서 개최되는 ‘2010 서울모던아트쇼’에도 참여한다. 10인의 작가 작품을 프린팅한 옷을 입고하는 패션쇼에 제 화백의 작품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2010 서울모던아트쇼’의 ‘Preview & VIP Reception’ 패션쇼 중 제정자 화백의 작품 정(靜)·동(動) 을 프린팅한 의상

“모델이 패션쇼한 후에는 그걸 다시 마네킹으로 입혀서 전시장에서 보여줘요. 패션디자이너들이 상품화 시킬 수도 있겠죠. 굉장히 흥미로워요”

그녀는 세계미술교류협회 회장을 십 여년간 맡으면서 우리나라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초창기 한·독미술교류협회 명칭을 세계미술교류협회로 바꾼 것도 바로 그녀였다.

“점점 세계화가 돼가니까 우리나라 작가들을 데리고 러시아, 헝가리, 미국 등지에 가서도 전시를 했어요. 그 때마다 ‘왜 하필이면 한·독이냐’고 기분 안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자유롭게 어느 나라와도 교류할 수 있게끔 명칭을 바꿨죠”

▲정(靜)·동(動) 블루 / 210x150 / Cotten & Acrylic on Canvas

우리의 좋은 작가들을 외국에 알려온 제 화백은 지금도 세계미술교류협회 고문으로 있다. “되도록 우리 작가들이 외국의 좋은 전시장에서 해외전시회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금도 계속 노력하고 있는 그녀는 해외전을 준비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와준 여러 선배 작가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정말 좋은 선배님들 덕분에 앞으로 남은 생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요. 이러한 영향 때문에 후배들에게 화단의 선배로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매일같이 생각하고 있고요”

◈노력과 철학이 1등을 만든다

옛날부터 젊은 감각으로 옷을 입는다는 그녀. “예술을 하는 사람이면 세련되게 입어야한다. 남을 위한 예의도 있지만 자신만을 위한 예의도 있다”며 자기 몸을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그녀는 만약 미술을 안했다면 음악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이야기한다.

“가끔 그런 생각은 해요. 우리는 작업할 때 작업복 입고 손에 막 묻히고 거의 거지꼴이나 다름없거든요. 그런데 음악을 했으면 좀 우아하게 이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그러지 않았을까요?(웃음)”

그러나 사실 그녀는 미술 외엔 다른 건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녀는 작업할 때 목이 마를 정도로 노예처럼 정말 치열하게 작업한다. 맥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가만두지 않는다. “놀며 쉬며 하는 건 예술이 아닌 취미”라는 그녀는 전시회 때마다 넓은 공간에 자신의 작품을 놓고 쉼 없는 자기 공부를 한다.

“손님이 없는 뜸한 시간에 조용히 혼자 화랑에 앉아 제 작품들을 봐요. 그러면서 모자라는 부분들을 찾아내 계속해서 공부를 해요. 머리가 틔어지는 한 단계라고 할까요? 부족한 점들은 다음 전시회엔 반영을 하죠”

▲정(靜)·동(動) 레드 / 210x150 / Cotten & Acrylic on Canvas

제정자 화백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캔버스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을 정도로 그림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림은 단순히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 준 아끼는 도구가 아니다. 그녀에게 그림은 삶의 의미이자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홍대 다닐 때의 연장 생활이예요(1962년 미술학부 서양학과 졸업). 지금까지도 학생 때처럼 작업하고 있으니까요. 아마 그래서 덜 늙는 건지도 모르죠(웃음)”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평생 그림만 그린다고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만의 어떠한 시기 시기마다 눈을 떠야한다. 그렇지 못한 채 자신만의 매너리즘에 빠져 작품이 발전하지 못한다면 치열한 예술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가(家)자 소리를 들으려면 자기 작품에 대해 변도 못하면서 우왕좌왕하면 안되죠. 최소한 자기 자신의 작품에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자기 작품에 대한 냉정한 비판의 시선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음악도 듣고 책도 많이 읽으면서 다른 계열에 대한 지식을 쌓으며 자기 개발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제정자 작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 화단의 최고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정자 화백 프로필

개인전 20회 및 단체전 다수

주요단체전 및 국제전
국립현대미술관, 선재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초대전
2010 파이낸셜 뉴스 미술제-현대미술 110인 초대전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09 쾰른아트페어21 (쾰른엑스포, 쾰른, 독일)
2009 한·중 수교 17주년 특별전 (상상국제미술관, 중국, 베이징)
2008 KIAF(국제아트페어)
2004 동북아시아전 (한·중·일)
2000 한·독 교류전 (독일,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1993 예술의 전당 전관개관 기념초대전
1991 Tokyo Art Expo (하르미, 일본, 도쿄)
1987 국제 Impact Art Festival (경도미술회관, 일본, 교토)
1987 Valpariso 비엔날레(8th Bienal International De Arte Valparaiso) (칠레)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선재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홍익대학교박물관, 대전시립미술관, 성남아트센터

현 한국미술협회 고문
현 세계미술교류협회 고문
현 미술과 비평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