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소년, 소녀, 영화 ‘소나기’ 만나다
[연재 충무로야사] 소년, 소녀, 영화 ‘소나기’ 만나다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10.06.0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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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서 여름 냄새가 난다. 꽃냄새, 흙냄새, 볕 냄새, 바람 냄새.

 바람 냄새는 비 냄새를 몰고 온다. 흐린 날 비 냄새는 그러려니 하지만 볕이 쨍쨍한 여름 한낮 건듯 부는 바람 속 비 냄새는 유별나다.

 “소나기가 오려나?!”

 ‘참 먹구름이 한 장 머리 위에 와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 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마루를 넘는데 떡갈나무 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 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이상은 황순원 선생의 단편소설 ‘소나기’에서의 묘사이다. 어린 날 고향 들판에서 보는 소나기 몰려오는 풍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볕이 쨍쨍한대 멀리 산굽이를 돌아 마치 하얀 모시자락이 펄럭이듯 소나기가 몰려온다. 빗줄기를 쏟아내는 구름층에 따라 짙고 엷게 지쳐오는 그 광경은 경이롭다 못해 환상이다. 십리, 오리, 오백 미터, 백 미터, 급기야 오십 미터 그리고 흠뻑 젖은 채 소나기속에서 허푸거리며 깔깔대던 유년시절의 우리. 시골 출신이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잊지 못할 기억이다.

 영화 ‘소나기’가 제작된 계기도 이 소나기 오는 장면에서 비롯됐다. 1978년도 이맘 때인가. 당시 영화의 메카였던 충무로3가,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서 모 감독과 영화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창밖에서 느닷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둘 다 충청도 시골 출신인 그와 나는 도심의 소나기 오는 풍경과 시골 소나기 오는 감흥을 비교하며, 흥을 돋우다가 내가 느닷없이,

 “감독님, 소나기 아시죠?”

 “소나기?!”

 그는 잠시 무슨 소린가 하고 창밖과 나를 번갈아 살폈다. 소나기는 이미 그쳐있었다.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 말입니다.”

 “아 알지, 응, 기가 막히지!”

 “그 작품을 영화화합시다.”

 우리는 즉시 부근 서점으로 가서 삼중당 문고판을 두 권 샀다. 그리고 대폿집에서 예의 소나기를 다시 한 번 통독했다. 사실 나는 소나기를 수차례 읽은 바여서, 새삼스레 다시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소나기 각색 구성안까지 머릿속에 예비하고 있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야 근데 이거 시나리오 되겠냐?”

 그는 약간 김이 샌 표정으로 물었다. 즉, 분량이 짧아서 러닝타임이 나오겠냐는 뜻이었다.

 “됩니다. 자신 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난색을 보였다. 이튿날 구성안을 가지고 그와 다시 만났다. 각색 구성안을 상세하게 검토하던 그가 활짝 웃으며,

 “음, 대단한데! 되겠어!”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비원 앞 모 영화 기획실로 달려갔다. 입심 좋기로 유명했던 그는 단숨에 영화사 사장과 제작진을 설득했다. 그날 저녁 기획실장과 감독과 나는 남현동 예술인마을에 사시는 황순원 선생님 댁을 찾았고, 순조롭게 원작 영화권 계약을 마쳤다.

 당시 나는 황순원 선생님 댁 이웃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은 S대학과 K교수댁이었고, 아래편으로는 대학스승이셨던 미당 선생님 댁, 왼편으로는 황순원 선생님 댁, 그 아래로는 연극계 원로이신 이혜랑 선생님 댁이 있었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시절, 가장 존경했던 분 중 한 분이신, 황순원 선생님과 이웃에 살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행운이었다.

 나는 원작소설의 짧은 분량을 러닝타임 한 시간 이십 분내지 삼십분짜리 시나리오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간 궁리 끝에 황 선생님의 단편 중 ‘산골아이’를 소년의 꿈 장면으로 삽입하기로 하고, 새벽 산책길에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선생님께선 그날따라 매우 기분이 좋으셨던지, 나를 보시자마자 언덕 위에 있는 선생님 댁 담 너머 떡갈나무 숲을 가리키시며, 대뜸

 “이군, 저기 저 숲 밑에 원두막 같은 정자를 짓고, 이군하고 나하고 청주 한잔 하면 어떻겠나?”

 하시는 거였다. 뜻밖의 말씀에 말문이 막혔다. 평소 청주를 좋아하시던 선생님의 기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나 역시 청주파였기 때문이었다. 그땐 술인 청하가 나오기 전이었나 싶었는데, 이후 영화계에서 내 별명이 청하가 되어버린 동기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자리에선 선뜻 ‘산골아이’에 대해 말을 꺼낼 기회를 놓치고 그날 밤 청주 두병을 사 들고 선생님 댁을 다시 방문했다. 선생님께선 의외로 기꺼이 허락해주셨다. 두 달 후 각고 끝에 각색을 마무리했다. 감독과 기획실장 촬영감독들은 모두들 열광했다. 스토리텔링이나, 기승전결식 대사위주의 시나리오가 아닌 시각적이고 영상적인 각색이 신선한 느낌을 준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 작품을 국제영화제에 출품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당시 중견시인으로 영상물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이셨던 K선생님께선, 일부러 전화하셔서, 칭찬하시고, 만나서 차라도 한잔 하자고 하셔서, 사실 내 심정은 좌불안석이면서도 우쭐했었다. 게다가 촬영 장소까지 필자의 고향으로 정해져,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너무 좋은 일만 있은 탓인지, 마가 끼었다.


 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고치지 않으면 영화제작을 할 수 없다는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이유인즉 지방흥행사들이 판권계약에 난색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시나리오냐, 이해할 수 없다, 왜 대사가 없느냐, 이건 애들만 나오는 동화가 아니냐며 이제까지의 찬사는 증발하고 비난이 쇄도했다.

 나는 영화사에 불려갔다. 제작자 S사장은 당장 재 각색하라고 다그쳤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감독과 기획실장등 스태프진도 어느새 영화사 주문에 편승해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고칠 수 없다고 버텼다. 원작소설의 향기와 나의 머릿속에서 나름대로 승화된 영상 이미지를 제작자나 흥행사들의 강요로 훼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황순원 선생님의 문단 위상이나 모든 문학작품 영상화에서 치명적인 선례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뿔나게 내가 무슨 작가주의나 아트필름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편소설 ‘소나기’가 나의 각색에 의해 그렇게 망가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며칠 동안 잠이 오질 않았다. 영화사와 감독은 계속 시나리오를 고쳐오라고 전화를 해댔다. 나는 계속 거부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장이었다.

 나는 결국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소나기 영화화를 다른 영화사와 추진하기로….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까, 고향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종가에서 소나기 촬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가에서는 내 각색 작품이라고 해서, 온갖 편의를 다 동원해서 협조한 모양이었다. 강마을 사람들도 산마을 사람들도 농사일까지 제쳐두고 무슨 경사나 난 듯 법석을 떨었단다.

 뭔가 미심쩍다 했는데 며칠 후 충무로에 나갔더니, 충무로 참새떼들 소문에 고영남 감독이 황순원 소설 ‘소나기’ 촬영을 완료했는데, 편집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니 기가 막히게 잘 찍었다고 소문이 떠들썩했다. 그리고 내게 모두 축하한다고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소나기’말고 다른 원작소설 좋은 거 있으면 함께하자고 부추겼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소나기’ 스태프들은 후반작업을 하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보름쯤 지났을까, 고영남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산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기술시사가 있으니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왠지 내키지 않았다. 영화사 사람들과 갈등도 있고 해서 어색했지 때문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참석했다. 영화사 사람들과 스태프들은 의외로 내게 다가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기술시사회인데도 다른 영화사 사람들과 감독, 작가들, 그리고 기자들이 몇몇 참석해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나기 오는 장면은 어떻게 촬영했을까, 화면에 고향과 종가의 풍경은 어떻게 비춰질까, 작중 소년, 소녀 역은 누구를 어떻게 선정했을까 등등.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시나리오 작가의 영상적 이미지와 감독의 연출 이미지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눈앞이 아뜩했다.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 분이 지났다. 삼 분이 지났다. 소녀가 등장했는데 소녀는 단발머리가 아닌, 긴 머리를 땋은 갈래머리였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슬그머니 시사실을 빠져나왔다. 그날 밤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시사회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는데 어딜 갔었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소나기’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영화관이 아니라 TV화면이었다. 그 영화는 내가 각색한 시나리오와 너무 다른 이미지와 컬러의 ‘소나기’였고,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스토리만 차용해온 감독 고영남의 소나기였다. 갈꽃, 청량한 가을 햇살, 징검다리, 학, 가을햇살아래 나풀거리는 소녀의 단발머리 등 소설과 시나리오에서 필요한 모티프들은 이미 실종되고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로선 별로 탐탁지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던 그 필름이 모 방송국 TV화면을 통해 해마다 몇 번씩 방영이 되었고, 시청률도 상당히 높았다는 것이었다. 소나기가 제작된 해가 1978년인데, 사십 년이 가까워진 지금까지 해마다 몇 번씩 방영되곤 했다. 그리고 시청자 중엔 영화 ‘소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까지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또한 모 외국어 방송 채널에서는 한국문학 해외 소개 차원에서 영화 ‘소나기’를 방영했는데, 상당히 좋은 반응과 성과를 거두었다고 권위 있는 일간지에 보도된바 있었다. 또 삼년 전에는 문화관광부 및 관광공사, 한국마사회의 후원으로 영상자료원에서 필자의 고향 강가에 ‘소나기’ 촬영장소 기념비까지 세우고, 소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네티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와, 시사회와 세미나 좌담회 등 푸짐한 행사까지 열어, 나로선 덤덤함 속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묘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이는 아무래도 황순원 선생님 작품의 문학적 향기와 감동의 영향력일 수밖에 없다. 이후 최근에 제작된 몇몇 영화와 미니시리즈에서도 단편소설 ‘소나기’를 원용내지는 차용해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것을 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얼마 전 모 방송국 TV문학관으로 다시 제작해 방영한 것을 보면, 소설 ‘소나기’에 대한 감동과 여운은 끝없이 이어질 전망이다.

 그래서인지 고향 강가에 영화촬영 기념비이긴 하지만, 우리 문단의 두 거목이셨던 황순원 선생님, 김동리 선생님 작품을 고향에서 영화로 재현했고, 또 기념비에 존함과 작품명을 새겼다는 것은 내겐 큰 보람이다. 끝으로 이 지면을 통해 정부 관계부처와 국민들에게서 제언할 것은 우리나라도 선진 외국처럼 국민정서와 문화예술에 크게 기여한 문학인 및 예술가 등의 생가 및 고향은 보다 더 관심 있고, 성의 있게 관리되고 보존되어야 한다고 부기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