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가고 시는 남다
사람은 가고 시는 남다
  • 임고운 영화칼럼리스트
  • 승인 2010.06.2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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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 가장 뜨거운 시간 영화 '시'

영화에서 각본이 지니는 문학성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일찌기 루이스는 이미지를 두고 "언어로 짜여진 그림"이라고 표현했다.

영화는 일정한 시간동안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의 연속이다.이러한 이미지를 존재의 차원을 지향하는 속성을 지닌 시의 언어로 선택한 이창동은 역시 소설을 썼던 감독답게 영화 '시'에서도 언어로 담긴  삶의 의미를 중작의 깊은 향기처럼 느끼게 한다.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서 간병인 아르바이트를 하며 손자와 살고 있는 할머니 미자는 병원에서 나이를 묻는 의사에게 예순 여섯의 나이를 한 살 낮춰 말하는 귀엽고 소녀같은 노인이다.미자는  멋쟁이 답게  모자와 스카프를 좋아하고 하늘 거리는 꽃무늬 블라우스를 즐겨 입는다.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시쓰기 강좌가 열리고 미자는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며 그날로  강좌등록을 한다.

 미자의 손에는 작은 노트와 펜이 쥐어지고  하늘과 나무, 화분의 꽃들, 새소리를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로 옮겨 쓰기위해 시 선생이 일러 준 대로 그녀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루종일 바라본다.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시를 써 보지 못한 미자는 수업중 시인에게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 할 뿐이다.

삶의 의미를 되찾은 미자에게 이러한 행복도 잠시, 얼마전 동네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여중생의 죽음이 손자와 그 친구들의 성폭행때문이었음을 알게 되고, 학부형들이 합의금으로 제안한 오백만원은 그녀에게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으로 다가온다.

정신적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끔씩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알츠하이머증세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은 미자는 이제 삶의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미자는 시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손자에게는 평소처럼 밥을 남기지 말라는 잔소리와 함께 죽은 소녀의 사진을 식탁위에올려 놓는다.

너무나 약해서 주변의 부조리에도  금방 휘어질 것 같은 미자, 그러나 그녀는 손자의 손톱을 깍아주고는  출동한  경찰에게 넘기며 아무일도 없다는 듯 시낭송회에서 알게된  경찰과 배드민턴을 친다. 다음 날 마지막 강의시간에 시 한편과 꽃다발을 남기고 여학생이 죽음을 택했던 강가로 조용히 발을 옮긴다.

자신의 꿈을 한편의 시로써 이루어 낸 미자에게 죽음은 또 다른 시로 쓰여질 것이다.

살기가 고단해서 혹은 너무나 바빠서 무관심했던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안타깝게도 인생의 황혼기다.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역시 죽음을 앞둔 노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다룬 영화다.

남편 루디의 암선고를 전해 듣고 이 사실을 루디에게 숨긴채 마지막 여행을 계획한 투르디는 여행 도중 예기치 않게 먼저 죽음을 맞게 되고 홀로 남겨진 루디는 도쿄로 막내아들을 찾아가지만 무관심과 냉대로 인해 더욱 쓸쓸해진다.

루디는 비로소 그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 있는 동안 깨닫지 못했던 아내의 사랑과 그녀가 접어야 했던 꿈을 알게 된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 마지막 삶의 여정을 아름답고 진실하게 표현해 유럽 영화상을 비롯 유럽 영화계를 감동시킨 것처럼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칸느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으며 십여분의 기립 박수를 받은 것은 두 영화 모두 삶을 마감해야 하는 노인의 심정을 진실하게 표현함으로써 가능했다.

삶은 자신도 모르게 쓰여지는 장편의 시다. 아니, 삶자체가 상징과 비유로 가득찬 살아있는 문학이다.

'시'가 죽은 시대가 아니라, 마음이 죽은 시대다. 무엇보다 '시'는 계속 쓰여지고 읽혀져야 한다.

자본주의의 서슬퍼런 양육강식에 지치고 고단해진 현대인의영혼을 달래 줄 수 있는 건 다시 문학이다.

김용택시인이 영화속에서 얘기했듯이 시를 쓰려는 마음과 우리 삶의 주변을 깊이 바라보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라디오 체조만 했어도 낫을 것이라는 일본의 소설가 다자이오사무의 노이로제는 다름아닌 우울증이었다.

이후,다자이의 애독자들은 물론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산으로 들로 뛰게 되었다. 이것은 여전히 현대사회에서 문학이 지탱해 주고 있는 힘이 만만치 않음을 시사해 준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보는 시대의 위기감은 '문학적 상상력의 부재'다. 그는 많은 이들이 잠재적시인임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언제나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