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천대받는 자와 밤의 대화>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천대받는 자와 밤의 대화>
  • 이상정 인턴기자
  • 승인 2010.07.0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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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에 대해 투쟁해야하는 시대는 슬픈 시대”

[서울문화투데이=이상정 인턴기자] 이 연극, 잘생긴 배우는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이인(二人)극이다. 게다가 즐겁지 않다. 러닝타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음에도 가슴을 짜는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려한 연출이나 무대 등 시각적인 효과는 없지만, 이 연극이 담고 있는 내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자유와 저항, 그리고 권력에 대한 적나라한 코멘트는 극 중 작가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만큼이나 고통스럽지만, 이 부분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극은 새벽을 배경으로, 작가와 그를 죽이러 온 사형집행인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이 무거운 기본 배경은 별다른 효과 없이 배우 둘의 대사만으로 충분히 표현되는데, 그들은 단 한 번의 장소 변화도 없이 절묘하게 할 말을 모두 토해낸다. 그렇게 본다면 러닝타임이 짧은 것은 오히려 주제전달 측면에서 오히려 효과적이다. 하고 싶은 말만 하는, 하고자 하는 행동만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이 소설의 원작자인 브레히트가 말한 ‘드러내기’ 효과를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숨기지 않는다. 타인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는다. 때문에 모든 행동들은 은폐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난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창문 밖을 향해 악을 지르는 작가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행위 할 수 없는 것들은 대화를 통해 극의 장면 속에서 구현된다.

‘드러내기’ 효과는 바로 이런 모습들이 주는 낯설음에 주목한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연극들이 적절한 상황 전개나 극적 재미를 위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숨기는 것이 있는 반면 <천대받는 자와 밤의 대화>는 제목부터 내용까지 숨김없다.

날 것의 ‘자신’ 발견

지루한 자기 고백의 상황을 구현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잘난’ 우리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싸이월드와 블로그가 성행하고 있지만 아직도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밖으로 꺼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극을 통해 그리고 인물을 통해 가려지지 않은 날 것의 ‘자신’을 발견해내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충격인 것이다.

실험극 <천대받는 자와 밤의 대화>는 원작의 상황과 대사에 충실한 반면, ‘한국’이라는 공간과 ‘현재’라고 하는 시간적인 측면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 번역체, 문어체로 이뤄진 원작에서의 대화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관객들이 극을 이해하는데 어렵게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극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은 낡은 것이라 느껴졌던 브레히트의 극 이론을 충실히 재현해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