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화장전문 박물관, 코리아나화장박물관
국내 최대 화장전문 박물관, 코리아나화장박물관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7.21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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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과 외면의 미를 추구하는 우리 선조들의 전통 화장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이라 하면 ‘박물관’이라는 인식보다 코리아나화장품에 대한 역사를 보여주며 홍보를 하는 거대한 광고판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편견에 의한 잘못된 생각일 뿐, 그 어느 박물관에도 뒤지지 않는 역사적 자료들이 산재해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어느 날, 현대문명의 메카라 일컬어지는 강남지역에서 우리 선조들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빠른 발걸음을 내딛었다.

◈화장박물관의 탄생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은 신사동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스페이스 씨(space*c)의 5층과 6층(지하 2층, 지상 8층)에 자리하고 있다. 코리아나화장품(회장 유상옥)의 창립 15주년에 맞춰 2003년 11월 3일 준공한 이 건물은 단순한 문화시설이 아닌 독자 운영 가능한 복합 여가 문화공간이다.

▲신사동에 위치한 코리아나화장품社의 스페이스씨(space*c) 외관

박물관은 코리아나 화장품의 창업자인 유상옥 회장이 지난 40년간 모아온 5,300여 점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남녀 화장도구를 비롯한 화장용기, 장신구 및 생활문화에 관련된 유물 300여 점을 전시해 한국 화장의 역사와 문화를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화장은 얼굴에 하는 거라고?

화장이라는 말은 개화 이후부터 널리 사용된 외래어로서 순수한 한국어는 장식(粧飾/裝飾)·단장(端粧/丹粧)·야용(冶容)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표현이 있는 것은 가리키는 의미가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 화장만을 가리킬 때는 야용, 몸단장에까지 이르면 단장, 일반적인 화장일 때는 장식(粧飾)이었고, 장신구까지 치장한 경우에는 장식(裝飾)이었다. 특히, 옷차림마저 화사하게 하였을 때는 성장(盛裝)이라고 표현했다.

오늘날, 흔히 화장이라 하면 여자의 얼굴에 바르는 메이크업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화장이란 인간의 몸 전체를 아름답게 꾸미는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화장, 아름다움과 기술력의 결합체

5층에 있는 제1전시실에서는 화장용기, 규방, 분, 장도, 첩지, 가락지, 비녀, 노리개 등 시대별 화장 문화에 관련된 유물들을 소개한다. 전시실 한 편에는 한국의 전통 화장문화를 알려주는 영상도 상영되고 있다.

▲코리아나화장박물관 입구
▲5층과 6층으로 이뤄진 코리아나화장박물관 내부 전경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남자의 흉상과 함께 남자들의 전용 화장도구들이다. 남자는 계례나 혼례를 통해 어른이 되면 상투를 틀고 망건, 동잠 등으로 치장을 했다. 남성들의 화장은 오늘날처럼 미소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었다. 자신을 단장해 흐트러지지 않는 기품을 유지해 내면과 외면의 미를 추구하는 유교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조들이 사용했던 남성화장도구들이 펼쳐져 있다

남자 화장 도구 옆에는 여자들의 것이 펼쳐져 있다. 뾰족한 부분으로는 가르마를 타고 넓적한 부분으로는 빗살 틈의 때를 빼거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데 사용했던 빗치개가 눈에 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화장용기 중 고려시대 때 청자로 만들어진 것은 독특하게도 참외모양을 하고 있다. 참외의 씨가 많은 모습을 보고 참외를 다산의 상징이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산을 상징하는 참외를 본 따 만든 고려시대 화장용기

전시된 반지를 통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쌍가락지’는 틀린 표현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가락지는 본래 두 개가 붙어있는 것을 의미하며, 결혼한 여성만 낄 수 있었다. 반면에 미혼인 여성은 한 개로 돼있는 것을 낄 수 있었다. 본래는 두 개로 이뤄진 가락지를 한 개만 끼니 가락지의 반만 쓴다 해서 ‘반지’가 된 것이다.

▲반지는 가락지의 반만 사용한다 해서 반지다. 즉, ‘쌍가락지’라는 말은 틀린 표현이다

전시실 오른쪽 벽면(입구 기준)에는 보석삼각노리개(궁중에서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 주로 호박, 비취, 산호를 노리개에 단 것), 대한제국은제이화문분합(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양각한 은분합), 영락잠(도금 세공한 비녀머리에 산호, 비취, 진주 등으로 장식하고 움직일 때마다 영락이 미세하게 떨리도록 만든 비녀), 귀걸이 등 총 4점이 각각 유리관 안에 놓여있다.

▲대한제국은제이화문분합에 양각돼있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은 이 물건이 황실에서 사용하던 것임을 입증한다
▲호박, 비취, 산호를 노리개에 단 보석삼각노리개
▲영락잠은 도금 세공한 비녀머리에 산호, 비취, 진주 등으로 장식하고 움직일 때마다 영락이 미세하게 떨리도록 만든 비녀다. 걸을 때마다 스프링이 흔들려서 흡사 꽃과 나비가 움직이는 효과를 주도록 만들었다.
▲당시에는 귀를 뚫지 않았기 때문에 귀걸이를 실을 이용해 귀 앞뒤로 걸쳐서 치장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진귀한 전시품들에 얽힌 사연들은 친절한 큐레이터가 조목조목 자세하게 설명해주니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뿐만 아닌 시대상과 역사를 알고 싶은 분들은 하루쯤 신사동으로 나들이 오는 것을 추천한다.

◈옛 여인들의 화장법을 한 눈에

계단을 따라 제2전시실인 6층으로 올라가면 벽면에 붙은 한중일 여인들의 화장문화에 관한 그림과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을 가진 단아한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계단을 통해 6층 제2전시실로 올라가면 한국, 중국, 일본 여성들의 서로 다른 화장법에 대해 설명이 써있다.

중국은 굉장히 붉은 볼이 미인을 상징해 연지문화가 발전했다. 중국의 미인인 서시(西施, 중국 춘추시대 월국(越國)의 미녀)의 이마에 꽃잎이 떨어진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여겨 그 이후로 여자들이 이마에 연지를 찍었다고 한다.

일본은 얼굴을 하얗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눈썹을 지우고 이마에 까맣게 눈썹을 그렸다. 또한, 흑치(黑齒)가 미인이라 여겨 철을 희석한 물로 자신의 치아를 검게 물들였다고 한다.

3국 여인들의 화장법 설명을 지나면 우리의 전통 화장재료가 제조도구와 함께 분, 눈썹, 연지, 세안의 순서대로 경사를 이루며 전시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우리의 전통 화장재료가 제조도구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분의 경우, 곡식을 빻아서 쓰거나 분꽃 씨를 깨물면 나오는 하얀 가루를 사용했다. 또한, 얼굴이 백색이 아니기 때문에 칡가루나 황토가루를 섞어 피부색과 맞춰 사용했다.

숯으로는 눈썹을 그렸다. 나중에는 붓과 먹을 이용해 눈썹을 그렸다. 눈썹 모양도 그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데, 조선시대의 눈썹이 현대와 가장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연지는 7월에만 핀다는 홍화로 만들었다. 그 희귀성 때문에 값이 비싸서 서민은 붉은 고추를 동그랗게 잘라 대신 사용했다. 하지만 그대로 얼굴에 착용하면 따갑기 때문에 한지를 붙여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세안 시에는 녹두를 많이 사용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녹두가 미백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콩과 녹두, 팥 등이 세척력이 좋아 세안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테마전시 ‘모자의 나라 조선’

“조선 사람들의 모자는 신비롭고 인상적이다. 단편적 묘사만으로는 조선 모자의 가치를 다 보여주기 어렵고 품위에 맞지도 않을 것이다”(1885년 조선을 여행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벨 로웰)

▲6층 테마전시실에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자의 나라 조선’

해마다 2건 정도의 테마전시를 여는 코리아나화장박물관은 올해 그 첫 번째로 ‘모자의 나라 조선’(6층 테마전시실, 오는 10월 30일까지)을 선보이고 있다.

▲실내용·외출용·실용적·의례용의 네 가지 테마로 우리나라 고유의 모자들이 전시돼있다.

‘모자의 나라 조선’은 19세기 말 조선을 찾았던 외국인들에게 ‘모자의 왕국’, ‘모자의 천국’, ‘모자의 발명국’이라며 불릴 만큼 다양한 종류의 쓰개문화를 갖고 있던 우리의 모자들을 ▲실내용 모자 ▲외출용 모자 ▲실용적 모자 ▲의례용 모자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실내용 모자는 정자관(程子冠), 상투관(上套冠), 망건(網巾), 탕건(宕巾)과 같이 선비들이 사랑방에서 썼던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상투 튼 머리를 보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양반은 정신 수양의 의미에서 상투관과 함께 탕건, 정자관을 항시 머리에 쓰고 있었다. 관을 착용하지 않은 모습은 매우 친밀한 사이에서만 볼 수 있었다.

바로 왼편에는 실외용 모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갓의 크기가 다양했으나, 대원군 시절에 균일화됐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모인 갓은 사대부 남성의 외출 필수품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갓은 흑립(黑笠)이라고 부르며, 흰색 도포와 함께 조선양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외에도 대나무 테두리에 한지를 발라 우산 형태로 만들어진 의녀와 기녀 같은 노동계층이 주로 썼던 전모(氈帽), 돼지털로 만든 모자로써 하급관리가 착용했던 전립(氈笠)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융복(戎服)을 입을 때 쓰는 초립(草笠)이나 주립(朱笠)둘레에 꽂은 호수(虎鬚)다. 원래는 보리이삭을 사용했으나, 그 견고성 때문에 호랑이 수염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융복(戎服)을 입을 때 쓰는 초립(草笠)이나 주립(朱笠)둘레에 꽂은 호수(虎鬚)

눈을 돌리면 계절의 특성에 따라 만들어진 실용적 모자들이 전시돼있다. 옛 사람들은 비가 오는 여름이 되면 갈모(葛帽)를 썼다. 종이로 만든 고깔형의 갈모는 평소에는 접어서 휴대하기고 했다. 조선을 여행했던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는 이를 두고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명품이라 극찬했다.

▲당시 외국인들이 기막힌 명품이라고 극찬한 갈모(葛帽)

추운 겨울에는 방한모를 착용했다. 여성은 아얌을, 남자는 휘항을 썼으며, 남바위와 풍차는 남녀공용이었다. 남바위의 경우엔 여성은 앞 중심에 술이나 보석 등으로 장식했고, 남성은 장식 없이 사모나 갓 아래에 썼다.

국가와 가정의 대소사에 필수요소였던 의례용 모자에는 상중(喪中)에 사용했던 흰색 갓인 백립(白笠), 관리가 국상(國喪)때 착용하던 관모인 백사모(白紗帽), 문무백관들이 국경일, 대제례, 조칙 반포 시에 조복과 제복에 사용했던 제관 등이 있다.

더불어 갓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갓집과 함께 돌을 맞이한 아이들이 5살까지 썼던 굴레도 있다. 파란 끈이 달린 것은 남아용, 붉은색 끈은 여아용이었다.

기획전시관 한 편에는 여성용 모자, 궁중용 모자 몇 점과 함께 외국인의 눈에 비친 모자 관련 사진자료(‘파란 눈에 비친 조선’)도 함께 전시하고 있어 조선의 모자 문화를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고유 모자들은 외국 문물과 충돌하면서 급격히 사라지게 됐다. 요즘은 머리를 다듬기 귀찮을 때, 혹은 패션용으로만 쓰일 뿐이다. 그러나 이번 기획전을 통해 조선시대에 세계가 주목할 만한 멋진 모자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동시에 우리문화를 이해해보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도움말 이지선 큐레이터 / 구민경 에듀케이터

▲유상옥 코리아나화장박물관장(코리아나화장품 회장)

이 많은 물품들을 수집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젊어서 제약회사에 근무할 때 감성을 기르려고 서화를 보러 다니다가 옛 민속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도자기, 의약구(醫藥具), 화장구(化粧具), 장신구(裝身具), 의복(衣服) 등을 모았습니다. 서화나 도자기 같은 것을 모으려면 재정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했기에 젊었을 때는 돈이 덜 드는 민속품들을 한 점씩 챙겨 모았지요.

그러다 제약회사에서 화장품회사로 옮기면서 옛 여인들이 쓰던 유물들로 수집 방향을 정했습니다. 현재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고서화, 도자기, 회화 등 그 범위를 꾸준히 늘려가고 있습니다.

박물관 설립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시게 된 연유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 옛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에서 시작해 전통문화의 보존과 문화를 통한 사회적 공헌이라는 커다란 바람을 이루고자 박물관을 설립했습니다.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면서 외국으로 자주 출장을 갔었는데, 그 때마다 외국의 저명 회사들이 전문박물관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전문박물관을 가진 세계적인 회사를 소망하면서 하나 둘 씩 모으다 보니 수집품이 늘었고, 40년 가까운 세월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힘들게 모은 옛 유물들이 시민들의 볼거리로 바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옛 문화의 소중함을 깨워주는 동시에 제 오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박물관 설립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아끼는 애장품이나, 수집을 하면서 생긴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1998년 겨울, 30년 월급쟁이를 끝내고 회사를 창업한 뒤 파리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해외 출장 중이면 늘 그렇듯 루브르 박물관 뒤편의 앤틱 상가를 잠시 들렸습니다.

옛 것을 보는 즐거움에 이집 저집 기웃 거리다가 한 손에 거울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머리채를 쥐고 서 있는 소녀를 본 순간 한 눈에 반했습니다. 욕탕에서 나와 머리를 매만지며 손거울을 들여다보는 해맑은 여인상 이었지요. 화장품회사에 꼭 들어맞는 작품이라 구입하고자 했으나 가격이 만만치가 않아서 아쉬움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귀국 후 화랑을 하는 지인에게 그 아쉬움을 토로 했더니 며칠 후 연락이 와서 ‘자기가 보기에도 이런 작품은 만나기 어려우니 꼭 사야 한다’고 하더군요. ‘작품이야 좋지만 못 사겠다’고 전화를 끊었는데, 얼마 뒤 ‘그 작품을 놓칠 수 없어 계약하고 왔다’는 지인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소녀는 나의 애인이 됐어요.

‘아침(Le matin)'이라 이름 지어져 있는 이 소녀는 샤를 고띠에(Charles gauthier, 1831-1891)의 1890년 작품으로 그의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지난 2009년 11월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박물관 미술관 백년사 발전 공로자로 문화 훈장을 수훈하셨을 정도로 우리나라 문화 경영의 선구자라고 사료됩니다. 당시의 감회와 함께 경영난과 사람들의 무관심에 힘들어하는 오늘날 박물관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저의 수집품으로 박물관을 개관했고, 국립박물관 6기 교육생들과 82년부터 지금까지 박연회 강의 모임을 매월 2회씩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후원하는 ‘박물관회’ 회장을 맡아서 용산으로 이전 당시에는 후원회 회원 확장과 기부금 모금에도 노력을 했습니다.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으로 소장품의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 또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박물관, 특히 사립박물관과 지방박물관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람객들의 인식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물관은 단체 여행 시 잠시 방문하는 곳이라던가, 무조건 많은 유물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생각으로는 박물관이 가진 진정한 매력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많은 박물관들, 특히 지방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박물관에는 수집가의 열정과 노력, 전문 박물관이 가진 깊이가 있습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녀온 박물관에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보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보물들을 찾기 위해서는 가능한 여러 박물관을 자주 가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박물관들도 관람객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앞으로는 우리나라 박물관의 앞날이 더 희망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CEO 문화 활동은 외국에 비해 아직까진 부족한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산업 경쟁력에는 문화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평소에 많이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CEO가 문화 활동을 하면 기업 이미지가 좋아지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어요. 다양한 매체에 기사가 나가면서 신뢰감이 쌓이잖아요. CEO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식으로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CEO가 문화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기업체가 잘 돼야 합니다. 기업이 잘 운영돼야 CEO도 문화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거든요.

문화 활동은 기업의 경영내용을 확실히 하고 그 기업이 유력한 기업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활동입니다. 즉, CEO가 문화 활동에 투자한다는 것은 기업이 유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 기업이 국가나 사회에 능력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활동을 하는 CEO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신뢰도가 높아진다면, 기업의 성실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 경영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긍정적이 인식을 심어줘 기업으로서도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결과적으로 문화 활동의 혜택을 받은 시민들은 기업의 운영에 도움을 주고, 문화적 소양도 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CEO가 기업을 잘 경영해서 문화 활동을 많이 한다는 것은 국가의 경제는 물론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업이 앞장서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 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는 CEO가 많이 양성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특별전 ‘모자의 나라 조선’ 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취지로 열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박물관은 약 5,300점의 소장품이 있습니다. 이 소장품들로 매년 2번 정도의 테마전시를 개최하지요.

주제는 주로 화장문화와 관련된 것이 많지만 때로는 다른 소장품들도 수장고를 나와 한 번씩 바깥구경을 시켜줄 수 있는 주제를 잡기도 합니다. 유물이 아무리 많아도 수장고에만 넣어놓고 있으면 그건 박물관이 아니지요. 저는 관람객들이 다양한 유물을 볼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도 박물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우리 박물관 소장의 여러 유물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자의 나라 조선’을 마련했어요. 우리나라 문화에서 모자는 예의를 지키는 도구이자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장신구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장을 단순히 얼굴을 가꾸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우리 문화에서 화장은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모두 갈고 닦는 것을 의미했거든요. 때문에 모자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화장문화의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앞으로 기획 중인, 혹은 꼭 해보고 싶으신 전시가 있으시다면 무엇인지요

우리 박물관은 우리나라 화장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는 취지에서 화장문화 연구총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작년에 ‘한국의 화장도구’를 출간했고, 올해는 두 번째로 ‘한국의 화장용기’를 준비 중입니다. 향후에도 꾸준히 발간할 예정이고요. 그래서인지 올해는 올 하반기에 다양한 화장용기를 볼 수 있는 전시가 기획되고 있습니다.

전시에는 다른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각종 화장용기를 선보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화장문화를 다 소개하고 나면, 비슷한 문화권의 중국과 일본의 화장문화를 비교해 보는 전시를 열고 싶습니다.

앞으로 박물관을 찾아올 예비관람객들을 위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물관에 가는 것을 너무 부담스러워 해요. 박물관을 공부나 숙제하러 가는 곳이라고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꿔서 박물관으로 나들이나 휴가를 떠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박물관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우선 박물관은 냉방이 잘 돼있어 요새 같은 여름철에 휴가지로 제격입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도 부담 없지요. 저렴한 입장료와 간단한 점심이면 충분한데, 요새는 국립박물관들이 무료입장을 하고 있으니 점심 값만 있으면 되네요.

가족과 함께 하기에 부담 없는 장소라 아이들과 함께 간다면 자녀교육과 가정의 화목을 다질 수 있습니다. 또, 젊은 연인들의 나들이 장소로도 좋고, 문화적 소양을 쌓을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박물관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곳 이라고 여기고 한 100번쯤 가다보면 저절로 안목이 높아지고 문화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