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만 제 모습 찾은 ‘경복궁의 얼굴’ 광화문
60년만 제 모습 찾은 ‘경복궁의 얼굴’ 광화문
  • 박기훈 기자
  • 승인 2010.08.1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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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고종 중건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

[서울문화투데이=박기훈 기자] 광복절 65주년을 맞아 ‘경복궁의 얼굴’ 광화문이 3년 9개월여 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145년 전의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제6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광화문 현판 제막식이 진행되고 있다

광화문 현판 제막식은 지난 1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65주년 광복절 경축식’의 식전 행사로 열렸다. 이명박 대통령 내외,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 광화문 복원공사 도편수인 대목장(大木匠) 신응수 선생과 어린이 10명이 행사장 앞에 마련된 작은 북을 치자 ‘광화문(光化門)’이라고 쓰인 현판이 그 자태를 선보였다.

무대 앞 화면에서는 ▲1890년대의 광화문 전경 ▲일제강점기 ▲6·25 전쟁기 ▲1968년 1차 복원 모습 ▲이번 복원 과정 등 조선 태조4년(1395년) 처음 세워진 이후 615년 동안 나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겪어온 광화문의 역사가 사진을 통해 펼쳐졌다.

▲현판 제막식에 참석한 내빈들이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향하고 있다

광복절 경축식 행사가 끝난 오전 11시께부터는 식후행사로 광화문 개문식(開門式)이 이어졌다. 웅장한 피리 소리와 함께 경복궁 수문장의 개문(開門) 명령이 떨어지자, 광화문의 홍예문이 열렸다.

이명박 대통령, 이건무 문화재청장을 비롯한 독립유공자와 각계 대표들, 어린이 대표들로 구성된 개문식 참가단은 조선시대 임금만 드나들 수 있었던 가운데 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섰다.

이후 경복궁 전 구역이 무료로 개방되면서 본격적인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날 하루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15만여 명이 광화문 앞에서 새로운 국운 융성의 계기가 되길 기원했다.

▲이날 경복궁 전 구역이 무료로 개방되면서 본격적인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날 하루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15만여 명이 광화문 앞에서 새로운 국운 융성의 계기가 되길 기원했다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1927년 건춘문(경복궁 동문) 북쪽으로 이전됐고 6·25 전쟁 때 문루가 소실됐다. 68년엔 콘크리트로 복원돼 원래 위치와는 다소 벗어난 조선총독부 정문 자리에 놓인 바 있다. 이번에는 고종 중건 당시 위치에 소나무를 써서 원형대로 복원했다.

광화문은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됐으나,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나, 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후 1927년 총독부 청사가 들어설 때 건춘문의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됐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8년 복원됐으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시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원 위치에서 11.2m 뒤, 13.5m 동측, 3.75도 반시계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이번에 복원된 광화문은 기존 위치에서 틀어져있던 것을 바로 잡았다. 또한 기존 광화문이 콘크리트였던 데 반해 목조로 복원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서의 의미가 살아났다.

1968년 복원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을 기초로 만들어 걸었던 현판은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당시 경복궁 중건을 책임진 훈령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이 쓴 한자 현판을 디지털로 복원해 제작했다. 임태영의 글씨 그대로 오옥진 각자장과 양용호 단청장이 복원, 금강송에 글씨를 양각했다.

▲지난 15일 공개된 광화문 현판

한편, 이번 광화문과 주변 전각들의 복원으로 고종 당시 500여동에 이르던 경복궁 내 건물 가운데 25%정도인 125동의 복원이 끝났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앞으로 20년간 진행할 2차 복원사업을 통해 고종 당시의 76% 수준까지 복원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