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과 기본 조화 이루는 국내 예술 바란다
개성과 기본 조화 이루는 국내 예술 바란다
  • 인터뷰, 정리 김은균 사진 이은영 편집국장
  • 승인 2010.09.0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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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애정과 정열이 묻어 있는 연출가 -극단 미학의 정일성

처서가 바로 코앞인데도 쉽게 열기가 가시지 않는 요즘. 더군다나 습기까지 잔뜩 머금은 더위에 여름은 길게도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오전에 몇 가지 일과를 마치고 서둘러 도착한 대학로는 한산했다. 거리도 뜨거웠고 사람들은 지쳐보였다. 약속장소인 흥사단 2층 가비아노에 선생은 이미 도착해 계셨다. 짐짓 알고 있는 선생의 연세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색이 돌았고 차분한 모습이셨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강한 에너지가 실려 있었다.

분위기 파악도 할 겸 성향에 질문을 던졌다.

진보이십니까? 보수이십니까?

당연히 진보이지요. 예술은 본질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속성이니까요.

그런데 선생님 작품을 보니까 <그라운드 제로> 인가요? 복거일씨와의 작업은 의외던데요?

제가 아끼는 후배가 극단 신화의 대표인데 하도 부탁을 해서 하게 되었습니다. 복거일씨가 뚜렷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되도록 이면 다른 사람과 하라고 거절을 했었지요. 그런데 그것이 여러 번 돌았고 선생님께서 하셔야 된다고 해서 했습니다.

그동안 북한 인권을 다루는 작품은 <요덕 스토리> 등이 있었지만 북핵 문제를 지적하는 연극은 하나도 없었어요. 이는 남한 예술가들의 일종의 직무 유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진보와 보수의 결합이라 재미있겠다는 점도 작용했었습니다.

거창에 취재를 갔다가 선생을 뵌 적이 있어 거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거창 연극제에서 심사를 맡고 계시지요?

실은 거창에 가면 마음이 아주 편합니다. 거창이라는 동네가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지만 사실 지세를 보면 매우 기가 센 동네예요. 그래서 저처럼 기가 센 사람이 살기에는 잘 맞습디다. 나중엔 여기에서 자리를 잡을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올해로 22회 째인데 시작부터 경연형식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단순히 시를 쓴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작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춘문예에서 당선하거나 나름대로 공인된 문학상을 받았을 때 비로소 인정하는 것이 문단입니다.

그런데 연극계에서는 그러한 제도가 매우 부실합니다. 현재의 대학로는 더더욱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 거창 연극제를 만들 때 수상제도를 두어서 뭔가 후배들에게 격려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자고 해서 진행돼 온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상한 연극인들이 매우 용기를 얻고 작업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대회는 작가와 연출가 배우 등이 골고루 심사에 참여하지만 여기는 특이하게 연출가 3명이 합니다. 나하고 권오일 선생, 문고헌씨가 맡아서 하다가 권오일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종훈씨가 이어서 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계속 하게 됩디다.

요새 대학로에 사람들이 많이 없습니다. 큰 극장들이 생겨나서 소위 지하에 자리 잡은 소극장 연극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대학로를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풍토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대학에서 연극영화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제대로 된 기본도 못 배우고 현장에 나옵니다. 기술적인 측면은 그렇다 칩시다. 그건 평생 해야하는 거거든. 하지만 인문학적인 사고의 깊이가 메말라 있어요. 연극은 모든 것의 총합인 종합예술입니다. 당연히 철학과 인문학적인 공부는 기본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석사를 했었는데 거긴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너무 우리 것을 몰라요. 장민호도 모르고 졸업하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예요?

한동안 한국을 떠나 사셨지요?

서울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양방송(TBC) 프로듀서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고 그때는 나라자체가 원시시대였습니다. 1968년부터 20년 동안 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말씀을 잇지 않으셨다. 의외다 싶었다.

국립극단 배우과정 1기생이셨지요?

1959년에 국립극단 부설 배우 양성소 1기생은 그야말로 좋은 멤버들이 많았어요. 김금지, 김인태, 박경득, 김상순, 정욱, 백수련씨 등이 모두 1기생입니다. 정인섭 박사님, 국어학자 한갑수교수가 어문법을 가르쳤었고 이진순 선생님, 박진 선생님, 서항석 선생님께서 연출론 연기론 등을 맡아 가르치셨습니다. 2기에 오지명, 박규채씨등이 있었습니다. 4기에선가 중단이 되었다가 10년후에 5기를 뽑았는데 그때에 박상규, 정상철, 최상설 등이 나왔습니다.

최근에 리어왕인가요? 셰익스피어 4대 희곡을 모두 끝내셨는데요?

1998년 <햄릿>을 시작해 작년에 <리어왕>까지 모두 끝냈습니다. 공립이 아닌 열악한 사설극단에서 셰익스피어 4대 작품을 하기는 쉽지 않는 일이예요. 셰익스피어는 파도파도 끝없는 우물 같은 작품입니다. 인생이 담겨있고 우주관이 농축된 연극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 또 연극을 한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들 때마다 생각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 극을 할 때마다 삶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얼마만큼 잘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라고 봅니다. 관객들은 참 쉽게 풀었다고 합디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연출가의 고민도 있습니다.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배우들에게 화술을 잘 집어 주시는 연출가로서도 유명하신데요?

그런데 요즘은 화술강사로 잘 부르지 않는 것 같아요. 다들 무서워서 그런지, 실은 말이라는 것은 사고와 불과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말이 없으면 사고를 할 수 있느냐?’ 라는 형이상학적 얘기가 철학에서 나오는 정도니까요. 어떤 중견 연출가는 ‘자기 개성대로 하는 것이 낫지 않나’ 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서울대학에 있는 이현복 교수는 왜 평생을 걸쳐서 발음사전을 쓰겠습니까? 바른말이 분명 존재하는데 바른말을 쓰는 것은 배우의 임무이기도 한 것이지요.

역사적인 사실을 볼 때 역대 대통령들 중 바른말을 쓴 대통령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저는 배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어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른 표현법에 개성있는 표현력을 기르는 것이 연기력에 밑바탕이 된다고 믿고 있어요. 가령 “오 태양이여~”라는 대사를 한다면 예전에는 꿇어 엎드려서 고전적인 스타일로 했겠지요. 하지만 무대상의 어법은 자연스럽게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배우의 개성을 존중하는 편입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말하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에 배우의 개성을  판단하고 그 개인이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입니다. 그리고 개성이 두드러지고 표현력이 출중하면 그것 역시 자연스러워 집니다. 신구씨 같은 분이 그런 경우겠지요.

국립극단 법인화 문제와 예술감독 문제 때문에 올해 많이 분주하셨지요?

국립극단은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가질수 없는 법, 이는 연극계의 문제입니다. 문화는 스포츠와는 다릅니다. 스포츠는 '경쟁'이 목적이지만 문화는 '차이'를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어디 문화에 우열이 있던가요? 그런데 히딩크의 예에서 문화를 경쟁의 논리로 접근한다는 것이 천박한 사고에 기반한 것입니다.

이참에 한마디 해야 할 것은 평론가들이나 기자들이 너무나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어요. 한국 연극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러시아 연출가들이 오면 너도나도 위대한 작품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어요. 사대주의는 위험한 것입니다. 미국의 차가 우리보다 좋을 수 있지만 이건 기술의 차이인 것입니다. 문화는 우열을 가를 수 없는 겁니다. 어디 아프리카의 문화가 우리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나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자들이 더 공부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일천한 경험으로 한국연극을 평가하려 들고 있어요. 아직 젊은 친구들이라 더 공부하고 더 겸손해도 되는데 말이예요. 심지어는 저한테까지도 “지켜보겠습니다.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오만한 말투로 이야기 하는데 이거 참 잘못되도 한참 잘못됐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언론이 일종의 문화 권력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이번 일은 잘못된 언론과 문화부의 후진적인 정책관과 거기에 야합한 일부 연극인들의 합작품입니다. 아마 역사는 심판할 것입니다.

선생은 말투는 흥분을 넘어서 노기를 띠고 있으셨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연극계의 질서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국립극단 문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요?

우선 공론화 과정이 없었고 거기에 대한 정당한 대표성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지난 번 서울연극협회 토론회에서도 지적한 사항이에요. 그리고 심각한 인권유린입니다. 고용승계에 대한 이야기도 없이 전부 하루아침에 모두다 짐싸서 나가라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그래도 한나라의 국립극단 단원으로서 지켰던 자존감과 품위를 단 칼에 자른 행위이지요.

다들 자존심 상해 있고 심한 다들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습니다. 무슨 국립극단이 사설극단입니까? 지난번 국립극단 발족식 때 보니까 구자흥 이사장이 그런 말을 합디다. ‘국립극단은 연극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총체적으로 집약하는 상징이다’라고요. 맞는 말이지요. 단순히 연극인의 문제가 아닌 한 나라 문화예술의 척도가 국립극단 문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외국인을 영입한다는 것은 히딩크를 축구감독으로 모셔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말과 정서를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가 국립극단을 맡기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예술감독이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작품이 결정됐으며 연출가가 선임되서 연습에 들어가는지 앞뒤가 맞지 않지요? 근본적으로는 연극계를 진심으로 고민하고 충고하는 사람이 없다라는 것이지요.

대학로에 점점 관객이 줄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극장과 사람 수는 늘었는데 작품은 많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편한 곳으로만 몰리는 것을 볼 때 연극의 본질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후학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대학로에서는 연극 몇 편만 하면 누구나 연극인이라고 합니다. 서투른 것이 절대로 참신한 것은 아니지요. 저는 예술가의 감각은 나이와 정비례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얘기지요.

앞으로 이루고 싶으신 꿈이 있으신지요?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국미술사도 공부하고 싶고 종교학에 심취하고 싶습니다. ‘연극하면서 혼자 조용히 살걸’하는 생각도 해보았지요. 근원적인 것, 죽음에 대한 연구와 그것을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신인 시절 선생님들께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정말 잘하는 줄 알고 우쭐대다 이렇게 세월만 흘렀습니다.

인터뷰, 정리 김은균 사진 이은영 편집국장 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