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충무로야사] 카페 화이어 버드 (영화인과 카페들) -2
[연재-충무로야사] 카페 화이어 버드 (영화인과 카페들) -2
  • 이진모 /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10.09.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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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그 당시 어느 날 필자에게 낮선 손님 한 사람이 찾아왔다. 서울대 영문과를 나왔다는 이 친구는 후리후리하게 큰 키에 말쑥한 외제 홈스펀 차림새였다. 차림새에 비해 마른 편이었고 창백한 안색이었는데 어딘지 몰락 귀족 냄새가 풍겼다.

(아 나 하명성이라고 합니다)

라이온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이 친구는 명함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명함에는 영화감독 (하도형)이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본명은 하명성이고 예명은 하도형이라는 것이었다. 이 친구가 찾아온 이유는 시나리오 청탁 때문이었다.

내용인 즉, 자신은 우리나라 전설적인 서양화가 (이중섭) 일대기를 영화화 하려고 하는데 이 선생이 이중섭씨에 대해서 많은 자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명 화가들과도 교분이 두터우시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받고 시나리오 집필도 의뢰하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를 필자에게 소개한 사람은 당시 우리나라 대표감독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으로 있던 박태영군이었다. 박태영군은 대학 동창이었고 이미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입선을 했으며 재수생 이야기를 다룬 (광화문통 아이들)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실력파여서 필자는 그 친구를 쉽게 신뢰했다.

또한 그 당시 서울대 등 사학의 명문 출신들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당했거나 휴학을 한 채 영화계에 간간이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이 친구도 그런 친구 중 하나였거니 했다. 아무튼 그날 밤 이 친구와 박태영 감독과 필자는 저녁식사를 한 다음 영화 기획에 대한 의논도 하고 뒷풀이도 할 겸 명동에 있는 카페 화이어버드로 갔다.

그날따라 화이어버드엔 자리가 없었다. 말쑥한 신사들과 늘씬한 미녀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자리가 없어 되돌아 나오려 하자 Y양이 달려 나와 마침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VIP들을 위해 로열룸을 비워두었는데 미스터 리가 왔으니 내 준다면서 배려를 해주었다. 순간 필자는 하 감독이라는 친구의 안색을 살폈다. 술값이 비쌀 텐데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이 친구는 내 시선을 묵살하듯

(야! 우리 이선생 카페 인기가 보통이 아니시구만)

하고 호기롭게 말하면서 앞장서 로열룸으로 들어갔다. 로열룸은 넓진 않았지만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잠시 후 Y양과 3명의 여자들이 들어왔다. 예쁘고 신선해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었다. Y양에 의하면 이 여성들은 호스티스가 아니라 잠시 놀러온 Y양의 대학 후배들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술로 드릴까요? 우리집엔 모두 외제 양주뿐인데)

Y양이 그 친구에게 묻자

(아 좋지 이선생! 특별히 좋아하시는 술이 있으십니까?)

하 감독이 목소리 톤을 높여 내게 물었다. 약간 가성 같은 음색에 굵직한 변성이었다.

(아! 전 아무거나 좋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감독은 한 20여 종의 양주 이름을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무슨 시를 낭송하듯 읊어대었다. 순간 Y양과 3명의 젊은 여성들의 눈이 경이롭게 빛났다. 쉽게 말한다면 존경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앉아있는 탁자 위에 두툼한 원서 한권이 놓여있었다. 문학도들도 쉽게 읽지 않는 미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싱클레어 루이스의 (묵시룩의 4기사) 였다.

잠시 후 우리는 그 당시로선 고급술인 조니워커 블루와 고급 안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취흥이 도도해지자 그는 여자들을 흘깃흘깃 보면서

(이선생 혹시 시인 고은씨가 쓴 이중섭 평전 읽어보셨습니까?)
(아 예 읽긴 했습니다만)
(고은씨에게 원작권을 사서 그 평전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구성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순간 세 여성들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이 여성들은 처음 이 친구가 서울대 출신 영화  감독이라는데 놀랐고 싱클레어 루이스 소설을 원서로 읽는 다는데 놀랐고 화가 이중섭 평전을 영화화 한다는데 놀랐고 당시 천재 시인으로 운위되던 (고은)이라는 이름에 놀랐다. 고은씨는 당시 시(詩) (봄밤의 말씀)이라는 작품 외에 2편을 미당 서정주 선생으로부터 한꺼번에 추천받아 문예지 (현대문학)으로 화려하게 한국 문단에 입문한 천재 시인이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기행과 특유의 달변으로 화제를 뿌리는 한국문단의 우상이었다. 그리고 문화예술의 메카였던 명동, 인사동, 대학로, 신촌 등을 휩쓴 이른바 문화계의 대부 같은 존재여서 세여성이 놀란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뒤풀이는 하 감독이라는 기상천외한 인물을 통해 카페 화이어버드와 영화계인 충무로에 영화 아닌 숫한 화제와 헤프닝을 연출해 내었다.

정리 이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