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그 화려하고 정겨웠던 기억 저편
충무로 그 화려하고 정겨웠던 기억 저편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
  • 승인 2010.11.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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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화이어버드)와 영화인들

[서울문화투데이=영상교육원교수 이진모]충무로 그 화려하고 정겨웠던 기억 저편

이진모 /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카페(화이어버드)와 영화인들

 (이감독님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처음 만난 친구한테?)

 내가 정색을 하고 끼어들었다. 이감독이 멈칫했다.

 (그래, 이감독이 너무 심했어)

 옆에 있던 고영남 감독이 거들고 나섰다.

 (자네 말이야, 열심히 해, 화려한 의상을 입던, 거적대기를 걸치던 충무로에선 영화 잘

만들면 돼! 그걸로 끝이야. 무슨 말인 줄 알겠지?)

 고영남 감독은 하감독의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선배 영화인답게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면서도 하감독은 이감독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야 하감독, 너 이제 신고식 치렀으니 니 자리로 가라!)

 하고 내가 의미 있게 눈짓했더니

 (그래, 나 내일 크랭크인이야 꼭 참석해줘, 그렇지 않아도 연락 하려고 했어)

 (뭐 내일?)

 (응, 내일 아침 다시 전화할께)

 (감독님 그럼 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얼른 일어나 제자리로 갔다.

 (야 우리도 내일 구경 갈까! 서울대 출신은 영화 어떻게 찍나 보게!)

 현장 경험도 없고 조감독 경력도 없는 하감독에게 던지는 비아냥 섞인 말투였다. 그 말속엔 이십년 넘게 조감독을 했으나 아직 데뷔 못한 자조석인 푸념도 베어 있었다. 이튿날 숙취로 골아 떨어져 있는데 하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물론 어제 밤 말대로 촬영 현장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일어나지지 않았다. 하감독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충무로에 나갔다가 박태영군을 만나서 하감독의 크랭크인 소식을 물었더니 박태영군은 예의 소리 없이 씨-익하고 웃는 싱거운 웃음을 흘리면서

 (너 안 오길 잘했어 그 친구 아주 쑈를 했다 쑈를)

 하는 것이었다.

 (왜? 무슨 일 있었냐?)

 (그 친구 말이야. 그렇게 기고만장하더니 현장에서 레디고도 제대로 못하는거야)

 (그래?)

 (야! 얼굴이 뜨끈뜨끈해서 혼났다)

 촬영 현장엔 의외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합동 영화사 곽정환 사장과 직원 일동은 물론 다른 영화 촬영팀까지 북적거리며 구경하고 있어서인지 하감독은 처음부터 위축되어있었고 연출 지도와 레디고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수 연발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본 곽사장이 그냥 있을 리 만무했다. 노발대발 얼굴이 푸르락붉그락하며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하감독으로선 더 당황했고 쫄아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연히 화이어버드에 들렸더니 하감독이 혼자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여느 때처럼 주변에 예쁜 여자들도 없고 친구들도 없었다. 녀석은 수염도 깍지 않은 텁수룩한 모습으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나를 멀거니 쳐다보며 어색하게 쓴 웃음을 날리더니

 (야 이작가 나 감독 짤렸어)

 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영화감독 짤렸다구)

 (야 영화감독이 무슨 문어발이냐? 짤리고 말고 하게?)

 (정말이야. 그거 영화감독 아무나 하는 것 아니더라)

 (뭐가 아무나 하는 것 아니야? 시나리오대로 찍으면 되지)

 내가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했더니

 (아냐 아냐 개망신 당했다)

 (이런 기고만장할 때는 언제고 쪼다같이...)

 그 날 밤 또 하감독을 위로하고 고무시킨다는 이유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녀석은 술이 만취해서 울다가 웃다가 노래를 불렀다가 마치 삐에로처럼 흐물거렸다. 나는 공연히 녀석의 그런 꼴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녀석이 밉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되었다. 차라리 크랭크인하기 얼마 전 돈키호테처럼 기고만장하던 그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나는 적군이던 우군이던 기가 죽어있는 꼴은 보기 싫었다. 당장 내일 죽을 지라도 의기 아닌 객기라도 살아있는 꼴이 내겐 보기에 편했다.

 (야 그럼 그 영화는 엎어버린다는 거야 뭐야?)

 (아니야 다른 감독 시킨대나 봐)

 (다른 감독 누구?)

 (곽정환 사장이 감독한대나 뭐래나)

 (야 넌 왜 그 모냥이냐? 얼마 전까지 기고만장하던 그 객기는 어디로 갔어?)

 녀석의 의기소침해진 꼴을 보자 나는 더욱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녀석은 마치 죄진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때 언제나처럼 또 한 패거리들의 영화 스태프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그 틈엔 자칭 만년 조감독이라는 이감독도 어김없이 섞여 있었다.

 (어! 이작가)

 이감독은 내 얼굴과 하감독 얼굴을 번갈아 살피다가 내 얼굴에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묵묵부답 그들을 노려보다가 

 (야 하감독 나가자 인사동에 내가 가끔 가는 (탑골)이라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 가서 한

잔 더 하자구!)

 우린 밖으로 나왔다.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린 묵묵히 빗속을 걸었다. 택시를 타기 위해 큰길가로 나서던 내가 우뚝 서며 뒤돌아섰다. 뒤따라오던 하감독이 의아하게 내 얼굴을 살폈다.

 (야 너 쌈 좀 하냐?)

 (쌈?!)

 녀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싸움 말이야 임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야 너 오른손 주먹으로 힘껏 내 얼굴을 갈겨봐!)

 하고 나는 얼굴을 들이대었다.

 (이작가 갑자기 왜 그래?)

 (쳐보라면 쳐봐 임마)

 (안 돼 난 평생 누구하고 싸움해 본 적이 없어)

 (이런 병신새끼)

내가 녀석의 면상을 향해 한방 날렸다. 녀석은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에 맥없이 쓰러졌

다.  

(이 새끼야! 그래 가지고 영화는 무슨 영화를 한다고 그래! 일어나 임마! 그리고 날 쳐

보라고! 그럼 내가 너 메가폰 다시 잡게 해줄게!)

녀석은 길바닥에 주저앉은 채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빗속의 가로등 불빛이 들썩이는 녀석의 젖은 어깨를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카페 화이어버드편 끝...

(정리 이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