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겨울 나그네' 와 카페 '겨울 나그네'
영화 '겨울 나그네' 와 카페 '겨울 나그네'
  • 이진모 / 시나리오작가
  • 승인 2010.11.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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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불세출 작곡가 슈베르트의 명곡 (겨울 나그네)는 그 감미롭고 음울한 리듬의 뉘앙스 때문에 누구나 쉽게 몰입하거나 감정 이입할 수 있는 곡이라 하겠다.
카페 (겨울 나그네)는 연세대 정문에서 지금의 신촌 지하철역 중간지점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과 두 어 평도 채 안 될 듯 한 비좁은 공간 이어서 4명 정도 들어앉으면 손님을 더 이상 받을 자리가 없었다.
 카페 주인은 여대를 중퇴한 젊은 P양과 J양이었다.
 둘은 최인호의 동명소설에 나오는 여대생 다혜나 그녀의 친구처럼 풋풋한 외모에 짧은 단발 머리였다.
 실내에는 (겨울 나그네)의 연가곡 중 5번인 (보리수)가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그땐 최인호 원작 곽지균 연출 영화가 개봉되기 한참 전이었는데 이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민우와 다혜의 러브 스토리가 마치 모든 대학생들의 공통된 체험처럼 캠퍼스에 확산될 때였다.
 이 카페의 단골들은 대부분 연세대와 이화여대 출신들 아니면 영화인 또는 각 대학교 음대생들이었는데 필자와 영화감독 (이만희 평전)을 쓴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인 유지형군, 또 그의 친구이자 필자의 후배인 화가 김평준 등이었다.
 아무리 단골이라고 하지만 선객이 있으면 우린 그 옆 (짱아네)라는 카페에서 기다렸다가 자리를 옮기곤 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카운터 겸 손님의 자리였던 길다란 탁자가 고작 실내 장식이었던 이곳에서 우리는 영화와 음악과 회화에 대한 화두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손님이 몰려오면 자리를 좁혀 안기도 하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 P양과 J양과 합석하기도 했다.
 원작자인 최인호씨가 연대 출신이어서 그런지 연대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때로는 인근의 이화여대와 홍익대생들까지도 몰려오곤 했다.
 장소가 좁다보니 화장실도 옆 카페인 (짱아네)하고 함께 사용했다.
 (짱아네)는 비교적 공간이 넓은 편이어서 손님들이 몰려올 때는 우리들이 (짱아네)로 옮겨 자리를 비워주기도 했다.
 86년도에 제작된 곽지균 감독의 영화 (겨울 나그네)가 흥행에 성공하자 서울 일원은 물론 전국 각지에 (겨울 나그네)라는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마치 카페 체인점처럼 프렌차이즈 사업을 해도 될 만큼 성업을 이루었다.
 영화 (겨울 나그네)는 곽지균 감독이 연출하기 전에 제 2세대 감독 중 한 사람이랄 수 있는 박종호 감독에 의해 이미 연출된 바 있었다.
 이 작품은 최인호 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내러티브여서 크게 히트하거나 붐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곽지균 감독의 (겨울 나그네)는 원작의 독서층 파급효과와 영화의 흥행요소 때문에 한동안 모든 한국 영화에는 다혜라는 여주인공이 빈번하게 오르내리곤 했다.
 영화 겨울 나그네는 다혜 (이미숙분), 민우(강석우분), 현태(안성기분), 제니(이혜영분)등 당시로서는 호화 캐스팅이었다.
 곽지균 감독은 탁월한 영상 감각으로 연출하여 당시의 캠퍼스 문화와 이 영화의 컬러나 뉘앙스와 호흡이 잘 맞아 젊은 층의 열광은 거의 폭발적 반응이었다.
 특히 제니 역을 했던 이혜영의 퇴폐적인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으로서 이 영화의 흥행 성공에 큰 몫을 했다.
 이혜영은 한국 영화의 최대 걸작이라고 일컫는 (만추)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의 딸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 외 이 영화의 음악은 슈베르트의 명곡과 동명이어서 당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지금 한국 예술 종합학교 등에서 교수직에 있는 김남윤씨가 맡아 바이올린과 피아노 협주에 의한 멜로디와 리듬이 한층 영화의 컬러와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작품의 다혜와 민우의 비극적인 결말과 라스트 시퀀스의 민우의 죽음과 다혜와 현태의 결혼은 마치 저 유명한 엘리아 카잔의 (초원의 빛) 라스트 시퀀스를 한국판으로 다시 보는듯한 감흥 내지 감동으로 매우 인상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는 충무로에서 술을 마시고 2차로 카페 (겨울 나그네)로 습관처럼 들르곤 했다.
후배 화가 중 임웅군은 아예 그의 아뜨리에를 카페 (겨울 나그네) 부근으로 옮기기도 했다.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겨울 나그네에서 영화와 음악과 회화에 대한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술이 만취해 임웅군의 화실에 몰려 들어가 합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임웅군의 화실을 모두들 (신촌호텔)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시인 박인환의 시 구절처럼 세월은 가고 추억만 남아 그날 그 자리는 신세대들의 모임장소인 롯데리아나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들만 즐비해 세월과 인생과 문화의 무상함만이 남아 있을 뿐... 이삼년 전인가 신촌 기차역 앞 어느 카페에서 (겨울 나그네)를 운영하던 P양과 J양과 모 여대를 중퇴하고 학교 정문 부근에서 (가을)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던 C마담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녀들 역시 이젠 할머니에 가까운 중년 여인들이 되어있어 더욱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카페 (겨울 나그네) 턴테이블에서 들리던 그 특유한 멜로디가 환청처럼 아슴프레 들려온다.
그리고 당시 젊고 풋풋했던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 둘 안타까운 추억처럼 떠오른다.
아! 그토록 정겨웠던 지난날들이여 그리움이여...

 

(정리 이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