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삶이 더 소중하다 - 시각장애인 배우 이영호
보이지 않는 삶이 더 소중하다 - 시각장애인 배우 이영호
  • 김은균 / 공연전문기자
  • 승인 2010.11.2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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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이 거리에 켜켜이 쌓이는 세모의 쌀쌀한 풍경, 광화문 새문안교회 안에 자리 잡은 예배당에는 연극연습 분위기가 열기를 돋우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은 불편한 배우의 걸음걸이였다. 화난 장면에서는 ‘씩씩’거리며 거칠게 걸을 만도 했으나 오히려 벽을 더듬어 짚고 조심조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그는 앞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연습하고 있는 작품은 이근삼원작의 <막차 탄 동기동창>이었다. 의술의 발달로 늘어난 노년의 생명연장과 준비되지 못한 노년기의 현실인식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생의 마지막 삼분의 일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노인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작품으로 12월 1일부터 5일 까지 신촌 산울림 소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동안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번 나들이가 근 십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거예요. 그동안 제안에서 성(城)을 짓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 보니 참으로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낍니다. 비록 앞은 안보이지만 다 볼 수 있습니다. 꼭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막막하게 집밖으로 나와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향해 가자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쉽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그는 깨닫고 있는듯하다.

홍익대 조소학과 71학번으로 <어제내린 비>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바람 불어 좋은날>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독재의 억압된 상황에서 변두리를 배경으로 청춘들의 좌절과 희망을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도 했었다. 이후 이청준 원작으로 이장호 감독이 연출한 <낮은 데로 임하소서>로 대종상 신인상을 받는 등 영화배우로서 부러울 것이 없는 세월이기도 했다. 그리고 앙드레 김의 추천으로 뉴욕영화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중 그는 박사학위를 앞두고 실명을 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눈이 좋지 않아 흐린 날이나 밤이 되면 더듬더듬 걷고 했었는데 그것이 ‘망망석 색소 변형’이라는 희귀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완전히 시각을 잃게 된다. 평생 영화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그에게 가장 큰 불행이 닥쳐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들이 단지 불편할 뿐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귀국 후 시각장애인들과 극단 소리를 만들어 93년부터 98년까지 7차례에 걸쳐 연극을 올렸고 EBS에서 ‘사랑의 한 가족’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컴퓨터 음성인식 프로그램이 나와서 이를 이용하면 웬만한 업무는 물론 하루에 세권의 책을 읽을 때도 있다고 하니 정보소외와는 멀어 보였다.

이번 연극에서도 노트북을 통해 대사를 듣고 교정하고 다시 발음을 수정하곤 했었다. 그가 작품을 위해서 처음에는 즐겨 피던 담배도 끊으려 했었지만 그것은 그리 쉽게 되는 모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먼지 쌓인 기타를 닦고 작품의 한 장면을 위해 맹렬히 연습하고 있다. 그의 빛나는 연기와 아름다운 기타 연주를 들으시려면 직접극장으로 찾아 와 보시길 권하고 싶다. 12월 1일 -5일 신촌 산울림 소극장 334-5915, 010-2750-8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