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일류 희극인 박춘재를 아십니까?
조선 일류 희극인 박춘재를 아십니까?
  • 현창섭 기자
  • 승인 2010.12.30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 봄 ‘박춘재명창 기념사업회’ 발촉, ‘박춘재기념관’ 건립 위해 희극인 동참

[서울문화투데이=현창섭 기자] 조선의 일류 희극인이자 경기명창 명인이기도 한 ‘박춘재’를 기리는 기념관 건립사업에  수많은 코미디언,희극인 들이 동참했다.

박춘재명인 기념사업을 통해 지난 11월부터 ‘박춘재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를 발촉, 김웅래교수를 잠정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한중문화협회 회장 김승호를 비롯, 엄용수 한국코메디협회회장, 김소응 한국옌예연기분과위원장, 또 박춘재 명인의 장손이며 <공예와 그림의 만남>작가(화가)이기도한 박진홍 등 많은 선배 연예희극인들이 동참한 가운데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명운동에는 요즘 안방극장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다수의 코메디언들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춘재 명인의 장손이며 공예가이자 화가인 박진홍씨는 “나의 할아버지는 명창에 재담가요 일류 희극인이었다” 며 “그 명성과 업적에 비하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못한것이 안타까웠다. 많은 사람에게 할아버지의 진가를 알리고 싶다” 말하며 박춘재명인의 기념사업의 일환인 기념관건립에 관심을 호소했다.

박춘재 명인은 1883년 4월 29일(고종20년) 독립문 부근 이판동에서 태어나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 호주 상속을 받아 성장하면서 그곳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우리 연예사에서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경기명창명인 박춘재는 어렵고 힘들고 암울했던 구한말시대 고종황제로부터 15세 어린나이에 ‘가무별감’중 일등으로 벼슬을 받으며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잡가를 비롯해 경서도소리(서울소리)와 재담(웃기는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재 다능한 재능을 뽑냈던 만능연예인으로 우리나라 1세대 연예인이라 할 수 있으며 당시 저작거리 아무데서나 놀던 놀이를 입장료를 받고 관객을 무대로 끌여들여 작은 공간에서도 볼 수 있고 즐길수 있도록 한 무대공연의 개척자 이기도 하다.


특히 박춘재 명인의 레퍼토리중 ‘장대장 타령’(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8호)과 ‘발탈’(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은 박혜일 명인과 백영춘 선생에 의해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시절 ‘일축’(일본 축음기상회)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녹음됐으며 또한 가장 많이 팔린 흥행사들의 표적대상 1호 이기도했다.


타고난 재담가이자 명인 이었던 박춘재는 당시 민초들과 울고 웃으며 위로를 주는 희극인이었지만, 1950년  8월 21일 6.25한국전쟁의 와중에 경기도 광주 외딴 시골에서 홀로 쓸쓸히 생을마감했다.

‘박춘재명인 기념사업’은 국악계는 물론 앞으로 더 많은 희극인들과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기념관 건립을위한 서명운동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계획이며 박춘재명인의 일대기 ‘조선 제 일류 가객 박춘재(작가 김은신)' 출판작업과 언론홍보를 통해 ‘명인 박춘재’ 알리기에 박차를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