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탑골'과 영화 '봄날은 간다'와 '연분홍 치마'
카페 '탑골'과 영화 '봄날은 간다'와 '연분홍 치마'
  • 이진모 시나리오작가
  • 승인 2011.01.1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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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라는 유행가 ‘봄날은 간다’의 ‘더라~’라는 어미(語尾)의 의미는 더할수없이 정겹고 청승맞아 서로를 쉽게 동화시키는 마력(魔力)이 있는 모양이었다.

노래의 2절에서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3절에서 ‘열아홉 시절이 꿈결속에 흘러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연분홍 흘러가는 신작로길에~’어쩌구하는 대목까지 부르는 이의 옥타브가 올라가면 미워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엉켜 덩실덩실 춤을 췄고 필자는 마치 사물놀이패의 날라리꾼처럼 더 구성진 꺽임과 애절한 음색으로 청승을 떠는 것이었다. 

 ‘그리고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까지 부르면 어느새 합창이 되었고 어느 인사들은 끝내 꺼이~꺼이 흐느끼거나 울음보를 터트렸다.
 요즘 신세대 정서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사연인즉 자신을 짝사랑했던 배다른 누이가 이 노래를 부르다가 꽃다운 나이에 노래의 가사처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듯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또 어떤 여류 화가는 자신을 사랑했던 연인의 18번이 ‘봄날은 간다’였는데 그 남자가 자신이 지나치게 클래식만 좋아했고 새침을 떨고 결벽증을 보여 상처를 입은 나머지 엘리아 카잔의 청춘영화 ‘초원의 빛’의 워렌비티처럼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결혼해 버렸다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노래가 1950년대에 백설희씨가 부른 이후 1980년대 말 가수 한영애씨가 다시 부르고 대한민국 톱 가수들이 일제히 한 번씩 함께 부르게 된 동기와 ‘봄날은 간다’ 혹은 ‘연분홍치마’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진 저변에는 또 다른 독특한 모티브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즉, 이 노래가 1950년대 유행가인데도 당시 1980년대 신인류들이 이 노래에 서정적으로 경도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때가 봄이었고 그 당시 마침 5·18광주항쟁이 일어났고 대부분 신군부에 저항했던 4·19세대와 386세대, 또한 당시 운동권 젊은 지식층들에게 정서적으로 상처와 슬픔과 저항정신적 측면에서 일체감내지 동질감을 준 것이 아닌 가 한다.
 

필자의 해석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봉기가 구한말 기미년 3·1독립운동에서 해방 이후 4·19혁명, 5·18광주항쟁까지가 대부분 봄철에 일어났고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데모가 봄철에 격화되었던 점이 이러한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무튼 카페 탑골의 전체적인 취흥 분위기는 1990년대 말까지 ‘봄날은 간다’가 주정적 컬러와 분위기를 조성해갔고 이후 대학로, 신촌, 인사동 일대는 물론 이러한 카페 정취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마치 유행가 ‘봄날은 간다’는 국민가요처럼 모든 사람에게 불려지게 되었다. 
 

이제 이번 회로 카페와 영화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가름할까 한다.
 그 당시는 대부분 영화 제작의 발상이나 단초가 카페나 커피숍에서 이루어졌기에 더 흥미로운 술회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글이 왠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어서 다시 한국 영화사조사(思潮史)의 본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한국영화 명감독열전과 명배우 열전을 한국영화의 시조격인 나운규 선생부터 재조명 할 까 한다.  

(정리 이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