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성악가 신금호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성악가 신금호
  • 인터뷰 이은영편집국장
  • 승인 2011.01.1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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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 겸 오페라연출가 신금호 인터뷰

‘오페라M’은 반포동의 어느상가 건물 5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의외의 장소였다. 위 아래로 프렌차이즈 커피숍과 음식점 들이 있고 극장 바로 옆은 은행이었다.‘이런 곳으로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찾아올까?’우리의 우려를 미리 알고 있었는듯“주위가 상가라 공연 할 때 쯤이면 모두들 퇴근 하셔서 공연이 시작될 저녁 쯤 이면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요”라며‘오페라M’의 예술감독이자 성악가겸 오페라 연출가 신금호는 우리를 맞이했다.

신금호는 우리가 부러워할만한 엘리트코스를 걸어왔다. 서울대음대를 졸업하고 영국왕립음악원과 왕립음악대학을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원받는 전액장학생으로 유학생활을 했으며 이후 YE CRONIS 오페라콩클 우승 후 런던 시티오페라단, 벨기에 알젠비젠오페라단 등에서 주역으로 연주했다.

또 콜롬비아에서 주최한 미주요 56개국 도시순회 오페라에서 솔리스트로 연주하는등 젊은 음악가로 왕성한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해야할 일들이 많음을 느끼고 한국으로 돌아와 오페라M의 에술감독으로서 오페라M을 꾸려가며 예술가들끼리의 협력과 공생, 그리고 생활속에 편안히 들어가 대중과 호흡하는 클레식을 위해 연출하고 연주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았다”는 그는‘훈남’외모 뒤로 뜨거운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을 감추고 있었다. 부드러움속에 자유로움을 품고있는 젊은예술가 신금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젊은 예술인상을 받으셨는데
콩쿠르는 사실 제 분야 쪽에 우월을 가리는, 어떻게 보면 운동경기에서 금메달 따는 듯한 느낌입니다. 콩쿠르대회의 상은 늘 긴장 하면서 준비하고 받았던 상이라면, 이번 서울문화투데이에서 주셨던 상은 예술인으로 종합적인 상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신인상을 받은 느낌이랄까요? 또 같이 수상하셨던 분들이 훌륭하셔서 저도 덩달아 대단해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당연한 질문인 것도 같지만 성악을 하게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중창단을 했습니다. 제가 학교 성적이 좋았는데 자꾸 중창단 활동만 열심히 하다보니 담임선생님이 못마땅해 하셨습니다.‘공부 좀 하는 놈’인데 자꾸 중창단 일에 신경쓰니까 성적은 떨어지고 좋은 대학 갈 것으로 기대하셨는데 많이 실망하셨나 봐요.

그래서 자주 혼도 나고 나중에는 저를 미워하신 것 같습니다. 하루는 이러시더군요.“네가 성악을 할 것도 아닌데 뭐 그리 좋은게 있다고 중창단을 쫓아다니냐?”그 말을 듣고 왠지 오기가 생겼습니다.“그래 성악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이 든거죠. 그래서 갑작스럽게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성악하겠다 하고요. 당연히 반대하셨죠. 그런데 우겼습니다. 하도 제가 성악하겠다고 우기니까“음대 가면 선생님은 할 수 있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되겠다고 약속하고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저는 음악적인 재능이 그리 뛰어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입시에 나올 만한 실기곡 죽어라 연습해서 턱걸이로 겨우 서울대학교에 들어 갔습니다.

일본에서도 인기가 대단 하시다는 소문도 있던데?
대단한 인기는 아니고요, 대구시립오페라단에서 연주할 때 인연이 되어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워낙 융숭하게 대접을 해 주셔서 제가 오히려 민망했죠.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번 좋아하면 꾸준히 좋아해 주시는게 있어서 자주 초청해 주십니다. 감사한 일이죠. 한국에서는 그냥 젊은 성악가의 한 사람일 뿐인데 일본에 가면 왕처럼 대접해 주시거든요.

인상적인 것이 일본 사람들은 저를 노래기술자로 대우해 주신다는 점이예요.‘장인’대우 해 주시는 것이죠. 그 환대가 좋아서 그냥 거기서 눌러 살까도 생각했습니다. 워낙 잘해주시니까요.
하지만 저는 한국인이자  한국에서 제 역량을 발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이 저에게 사회적 비용을 들인 것에 대한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아티스트들 무지 많습니다. 못 들어오는거죠. 와 봐야 너무 치열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그러니까 외국의 예술단 같은 곳에서 별로 좋지도 못한 대우 받으면서 일하고 있는거죠. 그만큼 우리나라의 사회적 기반이 안된다는 겁니다. 안타깝죠. 그것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고‘오페라M’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페라M’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면?
아무 욕심없이 시작한 단체입니다. 일단 기존에 많이 있었던 오페라단들, 단장님들의 이름을 건 오페라단들이 많은데 저는 그것이 어색하더라고요.‘신금호 오페라단’하는게 어색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젊은 성악가로서 제 이름을 거는 게 좀 이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오페라M’이었습니다.‘M’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는데요, 단순이‘Music’이나‘Muse’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manufacturer’또는‘market’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처음에는‘Music’이나‘Muse’라는 뜻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의미들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오페라M’은 시장을 만들어가고 개척해 간다는 의미가 더 커졌습니다.‘오페라M 에 소속돼있는 아티스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릇이 넘쳐야 물이 흐르듯 저희와 같이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먼저 잘돼야 그 주위에 있는 좋은 아티스트들도 자연스럽게 모일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페라M’이 앞으로 더 많이 알려지려면 아무래도 연주가 많아야 겠지요. 공연장에 연주가 늘 있어야 사람들이 모이지않겠어요? 그래서‘오페라M’은 기획공연을 많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1년에 30~50회정도의 크고 작은 기획연주들을 하고 있죠.
최종목표는 자체적인 힘으로 극장을 빌려서 오페라를 올리는 것인데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성악가로서 연출까지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 같은건 없습니다. 그냥 언젠가는 하고 싶었고 뒤돌아 연출, 기획을 하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보고 배운 특이한 연출 스타일을 접하면서 이런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가면  그동안 오페라나 클래식을 어려워 하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예를들면 우리는‘오페라’하면 16,17세기 옷들을 입고 공연하는 것을 많이 보시고 또 상상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국의 옷을입고 외국의 극을 공연하는데 배우는 한국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색하고 지루한 부분이 많이 생깁니다. 아무래도 맞지 않죠. 그런데 영국에서는 그런 정통적인 방식에 메이지 않습니다. 잘 안하더라고요. 그들의 전통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 대신 의상이나 스토리를 현대화시키기고, 연출도 특이하게 구성하면서 굉장히 다이나믹하고 재미있는 오페라가 만들어 지는 것이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동시대의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던 중에 저에게 영감을 준 두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두 분 모두 연출가 이신데, 한 분은 무대를 제작하시는 목수셨고 또 한분은 뮤지컬 가수 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분이 모두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가 되시는 것을 보면서 저에게 용기가 많이 됐죠.‘그래 나도 언젠가는 내가 직접 연출을 해보자’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거죠.

한국에 와서‘오페라M’을 꾸려 나가면서 연출을 직접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작든 크든, 그것이 오페라든 음악회든 한 두편 이라도 꼭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출을 하다 보니까 살짝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체가 뭐냐? 연출가냐 성악가냐? 아니면 기획자냐?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데 주위에서 혼란스러워 하시더군요.
그런데도 제가 버티고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저를 지지해준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특이하니까 저의 스타일을 존중해주는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팬들이 저를 살아가게 하는, 계속해서 제가 연출가와 성악가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혹자는 이런 말씀을 하세요.“노래가 안되니까 연출을 하지”또“음악이 안되니까 연출을 하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런 말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저는 제 노래에도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우선‘음악가’라고 불리는 것이 첫번째 목표이고 그리고‘다른 부분도 잘 해나가더라’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좋은 음악가이자 주위 예술가들과 공생할수 있는‘예술가’로 불려지고 싶습니다.

또 자본이 있는 사람이 기획을 해서 공연하고 수익도 올리고 그 수익이 예술가들에게 돌아가고, 이런 구조로 나아가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죠. 예술가들 끼리 모여서 기획하고 공연해도 십원 한 푼 안 생기는 공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개런티는 받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자 책임지는 사람도 있어야죠.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런 일들을 하려고 하니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출을 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저는 오페라하면서 아쉬운게 연습시간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페라공연은 뮤지컬과 다르게 연습시간이 많이 부족하거든요. 제가 원하는 연출방식은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익힌 방식이기도 하지만 모든 배우들이 댄스를 하고 하나의 힘으로 뿜어내는 에너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 에너지를 뽑아내려 애 쓰고 있습니다.

또 저는 의상이나 연출적인 부분은 파격적인 면이 있는데 음악과 가사부분은 절대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곡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때 작곡자들은 특히나 대본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본을 받고 곡을 만들었습니다.

또 외국의 말에는 액센트가 있어서 함부로 건드릴 때는 의미가 달라지는 부분도 생깁니다.  작곡자들은 그런 부분들까지 완벽하게 배려해서 곡을 썼기 때문에 그 작곡자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죠. 그것이 수백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저같은 음악가가 먹고 살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연출할 때 절대로 가사나 음악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대신 해설을 돕기위한 자막스크린을 무대 중앙에 배치합니다. 순수예술은 순수예술로서의 순수함은 지켜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출가로서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굉장히 분명한데요 성악가는‘재현예술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술자에 가깝다 말할수 있겠죠. 하지만 연출은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맘껏 만들어 낼 수 있어 매력적입니다. 성악가로서는 노래하면서 좀 더 색다른 것에 도전해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제한이 생기는데, 연출가는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시도 할 수 있는 부분들도 많이 생기고요. 그리고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겁 없이 뛰어 들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그렇게 했고 나름 즐기고 있습니다.

연출을 한다는 건 독특한 경험입니다. 재미있는 일이고요. 그리고 연출 후에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것도 색다른 경험입니다.
연출을 하고 나면 반응이 딱 두 개로 갈리더군요. 극찬이나 혹평. 저는 개인적으로‘예술에  중간은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연출을 하니 그 반응을 얻을 수 있더라구요.
오페라는 대중들에게 어렵다는 인식이 있는데요

클래식음악 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불문율처럼 이런 말 많이합니다.“클래식이 대중화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요. 어려우니 쉽게 풀어낸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온다는 보장도 없고요.‘대중화’라는 것은 결국 결과를 놓고 바라보는 입장 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놓고 볼 때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이 정말 충실하다면 일반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기본에 충실해 잘 만들면 반드시 알아 주시는 분들이 생길 것입니다. 문제는 클래식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 사장이든 노숙자 분들이든 직업의 귀천과 높고 낮음 없이 클래식 음악을 들을수 있는 동등한 기회들이 많이 제공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들이 동등하게 많이 주어진다면 그 기회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좋아해 주실 분들이 생길거라 봅니다.

그는 자신이 음악에는 별 소질이 없다고 말한다. 천재라고 불릴만큼의 특출난 재능이 없다는 뜻일 테지만 그는 타고난 끈기와 열정의 소유자였다. 음악적으로 천재적인 재능은 없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도 남을 열정과 끈기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보태 주위 아티스트들과 나누려고 하는 따뜻한 마음과 파격적인 연출도 마다하지 않는 창의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사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오페라로 영국 유학을 갔을 때 오페라를 내려두고 자신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많은 시간을 쏟은일과 한국에 와서는 그의 학벌과 경력으로 안정적이고 편안한 길을 갈 수도 있었겠지만, 오페라 연출자로 또 기획자로 늘 새롭게 변신해 나갔다.
그는 현재‘오페라M’의 예술감독으로‘오페라M’의 브랜드 파워를 키우고 싶어한다.
또한 공연으로 공연장을 알리며 대중들이 편안히 와서 즐기는 공연장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제 마흔이 된 그는 성악가 혹은 연출, 기획자 어느 자리에 얽매이기 보다 늘 좋은 예술가로 남고 싶어했다.

앞으로 그의 행보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