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윤동주 66주기 추모제에 다녀와서
후쿠오카 윤동주 66주기 추모제에 다녀와서
  • 김우종 / 문학 평론가
  • 승인 2011.02.2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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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에 일본 후쿠오카의 옛 형무소 뒷마당에서는 66주기  윤동주 추모제가 한일 공동주최로 열렸다. 한국대학신문이 작고 50주기를 맞아서 처음으로 추모행사를 갖게 된지 16년째가 된다.

16년 전 제 1회때는 교수, 학생, 문인, 기자 그리고 가수, 무용가, 풍물놀이 패까지 포함된 50명의 대규모 추모 행사단이 후쿠오카에 도착,  다음 날 추모제를 열었다. 그리고  곧 교토로 날아가서  2월 16일  아침에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 구내에  세워지는 시인 윤동주 시비 제막식에 참가하고 오후에는  윤동주 문학심포지엄을 주최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도시샤대학에서 마련해준 리셉션에 참가했다.

16년 전 그때 한국대학신문사가  그처럼 많은 비용을 무릅쓰고  윤동주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그 행사를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대학생이며 시인이었던 윤동주의 후쿠오카  옥사가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물음을 통해서  이 땅의 대학인들을 비롯한 모든 지식인과 온 국민이 마땅히 지향해 나가야 할 가장 올바른 정신과 삶의 지표를 여기서 찾고자 하는 것, 그리고  또  그 깃발을 온 세계의 하늘에  휘날리며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평화의 세상 만들기에 앞장서자는 것이다.

나는 1994년 가을에 후쿠오카 감옥을 찾아갔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반세기가 흘러서야 그토록 슬프고 원통한 그의 생체 실험장을 처음으로 찾아간 것이다. 너무도 야속하고 무심했던 우리 민족이다. 그 날 나는 감시 카메라가 매달린 감옥의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다가 눈물이 핑 돌았었다. 
해방의 날 반년을 앞두고  곧 죽게 될 한국의 젊은 대학생 시인이 저쪽 3층 감방의 창살에 발돋움을 하고 간신히 매달려 멀리  현해탄을 바라보며  민족의 운명을 슬퍼하고  어머니를 부르다가 팔의 힘이 떨어져서 쓰러졌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가 너무도 가여워  솟구치려는 눈물을 이겨내기 어려웠다. 
 한국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곧 대형 걸개그림 그리기에 착수했었다. 그리고 다음해 1995년 2월 14일에 우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송몽규(宋夢奎)등과 함께  웃고 있는 윤동주의  걸개그림 앞에 모여서 추모제를 시작했다.  겨울 방학을 이용해서 전국의 우수한 미대생들을 참여시켜 제작한 그림이다.

이 날 이  광장에서 서울대 이애주 교수(무용가)는 소복을 입고 풍물 놀이패들의 연주에 맞춰서 춤을 추며 윤동주의 넋을 위로하고 한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양희은 가수는 <아침 이슬>을 불러 주었다. 반주가 없어도 애수를 머금은  그녀의 맑은 노래는 담을 넘어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자리와 멀리  하늘과 땅에 울려 퍼졌다.
 이 날  일본 측 대표 니시오카겐지(西岡建治) 후쿠오카대학 교수는 내 뒤를 이어서 앞에 나가 한 손을 높이 치켜 들고 격한 목소리로 지난 날의 일제의 과오를 외쳤었다.

“우리가 윤동주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간담회 때 그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 진정한 한일간의 화해의 길을 우리 손으로 열어가자고 했다. 이 날의 행사는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며 증오와 분노로 원수를 갚자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가해자와 피해자의 만남을 토해서 참된 반성과 화해와 평화를 찾자는  것이었다.
 다음에 우리는 교토로 날아가서 윤동주가 옥사한 2월16일에 맞춰 거행된 시비 제막식에 참가했다.
 시비를 그 대학이 스스로 세웠지만 이것은 한국대학신문이 전년부터  교토의 코리아구락부(도시샤대학 출신 한국인동창회) 대표들을 만나서 시비건립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의지를 보인 결과 그 대학이 고맙게 뜻을 받아 준 결과였다. 도시샤 대학은 일본 근대사에서 많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대학이지만 그 동안 누구의 기념비도 건립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졸업생도 아니고 더구나 일본에 맞섰던 한국인  윤동주의  시비를 세운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 되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많은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수 백 명씩의 학생들이 교토에 가면 이곳을 답사하고 있으니 감회가 깊다. 

이번 추모제 20여명은 각자가 기본 경비를 부담하고 다른  비용을 한국대학신문이 후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측도 대표자 마나기미키코(馬男木美喜子)를 비롯해서  후쿠오카대학 구마기(熊木勉) 교수와 일반인등 약 30명이 참가했고 한국총영사관의  배판열 부영사도  함께 해 주었으며 서일본신문 기자가 취재해 갔다. 서일본신문은 17년전 형무소 사전 답사 때  그 사실과 다음 해의 추모제 계획을 전면기사로 보도해서 일본 전국에 알렸었다.
 우리는 새로 단장된 형무소 뒷담 앞에 돗자리를 깔고 양측 대표가 두 나라 말을 함께 써가며   영정 앞에 꽃을 바치고 술잔을 붓고  제사를 올렸으며   윤동주 찬가(김우종작)를  원명화 수필가가‘한국수필가협회’를 대표해서 낭송하고  <별 헤는 밤>을‘모던포엠’을 대표해서 허선주시인이  낭송했으며 다른 회원들도 윤동주를 추모하는 창작시등을 낭송했다.

이번에  추모행사를 함께해 준 일본 측 단체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은 17년전인  1994년 가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해마다 윤동주가 죽은 그 자리에 가서 꽃을 바치고 묵념을 올리며  그를 향해서 추도사도 하고  시낭송도 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매월 모여서 윤동주의 시 한 두 편에 대한  연구발표를 한 사람이 하고 다른 회원들이 다 함께 토의에 참가해 왔다.
그 동안에는 윤동주의 발자취를 찾아서 한국에도 다녀간 스기야먀 시인이 작고했으며  이들이 그동안의 활동사항을 묶어서 발행한 책자에는 이 단체를 창립하게 만든 아버지가 김우종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 후 이 단체는 그 동안의  공적으로  한국의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이 제정한 문화상 (상금 2천만원)을 받게 되어서 수필가 전숙희 재단 이사장의 뜻을 전했지만 이들은  수상을 한사코 사양했다.  2천만원이 아니라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해도 그 동안의 역할에 대하여 한국으로부터  어떤 대가를 받는다면 윤동주를 사랑하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 훼손되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 여성 회원은 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자기 집 정원의 수선화로 한 묶음 향기로운 꽃다발을 만들고 나와서  나를 맞아 주며 말했다. 윤동주의 맑은 향기가 해마다  그렇게 자기 집 정원에서 수선화로 피어나는 것을 꺾어 왔다고 한다. 30개 정도의 꽃대 하나에 각각 일곱송이 정도로 수선화가 피었으니 모두 200개 정도는 되나보다. 
 그리고  한 할머니는 신문기사를 보고 참가하게 되었다고 하면서“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 방은 남의 나라 ”(<쉽게 쓰여진 시>)라고 읽어 나가다가  자꾸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먹였었다.  
윤동주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가수나 배우들을 좋아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한류가 소리없이  가해자의 땅 일본 도처에서 작은 시냇물이 되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윤동주의 정신 세계는 세 가지로 집약된다.  순결과 사랑과 평화의 세 가지다.

이 세 가지가  하나로 묶이면서 완성된 곳이 윤동주가 순교자처럼 사라진 일본  후쿠오카 감옥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일본인 정원에서 수선화로 피어나서 그곳 을 방문한 한국인을 통해서 한국까지 돌아와 분단의 슬픔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한 서재에서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