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자랑하는 와라비예술촌
일본이 자랑하는 와라비예술촌
  • 임연철 / 국립중앙극장장
  • 승인 2011.03.1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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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秋田)현은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일본의 현(県)중 하나이다. 도쿄나 오사카, 후쿠오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관광이 이뤄지고 마음먹고 준비한 끝에 가는 곳이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札幌)나 오키나와 정도를 찾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아키타 현에 있는 다자와(田沢)호(湖)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편이 됐다. 몇 년 전 방영된 TV드라마 <아이리스>의 촬영지가 다자와 호수였던 것이다. 도쿄에서 1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아키타 공항은 눈 세상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목포에서 평창쯤으로 가는 셈인데 1월 마지막 주말(29일)에 가진 이색적 경험이었다.

▲달의 황제(맨 오른쪽), 카구야(맨 왼쪽), 산타(앉은 이)와 기념촬영.

눈 세상 아키타를 찾은 목적은 스키와 같은 겨울 스포츠도 아니고 마을마다 있는 온천의 노천탕도 아니다. 작지만 알차게, 자그만 마을이지만 일본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와라비예술촌과 와라비극단· 극장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와라비’란 고사리를 가리키는 순 일본어. 와라비 예술촌이 산간 농촌마을에 위치하고 있음을 한마디로 알아채도록 해주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아키타 공항에서 예술촌까지는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며 80여분 걸리는데 가는 동안은 물론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는 이튿날에도 싸락눈은 녹지도 않는데 계속 내려 모든 교통수단이 거북이 걸음이다.

지난 2월 강릉에 폭설이 내렸을 때 주민들이 집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지붕위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처럼, 주민들이 지붕위에 올라가 제설작업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길가에는 치운 눈이 사람 높이로 쌓여 있어 눈의 터널 속을 통과하는 느낌이 든다.
 온천 호텔과 함께 있는 와라비 극장은 주차장의 아스팔트가 보일 만큼 눈이 잘 치워져 있어 자세히 보니 아스팔트 위에 구멍이 있는 파이프를 설치하여 사용한 따뜻한 온천물을 뿜어내게 해 녹이는 시설이 돼있었다.
 800석 대극장 앞은 눈을 치우기 힘들어서 겨울동안은 휴관이고 200여석 규모의 소극장에서만 낮 공연이 있었다. 공연은 일본의 전통이야기를 소극장 뮤지컬로 만든 다케토리 이야기(竹取物語). 줄거리는 달의 황제가 말썽꾸러기 딸 카구야 때문에 속을 썩다가 벌로 딸을 지구로 보낸다. 지구로 보낸 딸이 나무꾼 산타(三太)와 사랑을 하게 되지만 다시 달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만큼이나 유명한 옛날 이야기여서 굳이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가 없는 연극이라고 한다. 통역을 통해 관극전에 스토리를 들었지만 실제 연극에서는 자막이 없는 탓에 미세한 부분까지는 이해가 쉽지 않았다.

젊은 남녀 주인공 시바다(柴田 雄)와 수에타케(末武 あすなろ)의 연기도 좋았지만 달의 황제와 다게토리 할아버지로 이중역할을 하는 와타나베(渡辺哲)의 열연이 돋보였다. 200석의 객석은 관객들이 어떻게 눈을 뚫고 왔는지 모르지만 꽉 찼다. 극장 주변에 호텔과 다자와 호수 주변 스키장에 왔던 관광객들이라고 한다.
 이 연극은 1월 22일 시작해 3월 21일가지 목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1시 혹은 오후 1시 30분에 공연한다고 하니 겨울이면 동한기에 들어가는 우리 지방 극장과 대조돼 많은 시사점을 얻게 됐다. 오히려 폭설이 관객을 불러 모으는 시골마을 극장 와라비의 마케팅 능력이 부러웠다.

와라비극단은 본래 도쿄에서 1951년 탄생했는데 1953년 민요와 민속무용이 잘 보존돼 있는 아키타현으로 본거지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도시를 버리고 외딴 곳으로 이사 온 것에 대해 카이가(海賀 孝明)대표는“극단의 본래 목적인 일본 전통 예술을 새로운 노래와 춤으로 창조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62년에는 민속예술을 조사하기 위해 민속예술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수 만점의 자료가 별도의 건물에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었다. 수장고를 안내하던 고다시마(小田島 清朗)소장은 몇 년 전 까지 연구원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혼자 지키고 있다며 10여 년째 이어지는 불황의 여파 탓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테이프로 녹음된 민요와 각종 사진자료의 디지털화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데서 선진국 일본 문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와라비극장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해 유럽순회공연도 몇 차례 했고 특히 2004년 5월에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뮤지컬 <제비(春燕)>를 공연해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한 겨울인 탓에 볼 수는 없었지만 듣기만 해도 부러웠던 프로그램은 중 ·고생 수학여행단이 농촌과 예술 체험을 위해 봄 ·가을 학기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찾아온다는 교육프로그램이었다. 부근 농가 300여 곳의 협조를 얻어 학생들은 생전 처음 농사일을 경험하며 일꾼으로 대접받고 연극을 보며 2중 체험을 통해 ‘인간다운 마음’을 기르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연극 관람뿐만 아니라 ‘소란부시’란 일본 춤도 배우는데 일본의 민요나 민속춤은 일하는 가운데 생성된 것이 많아 춤을 배우면서도 협동의 중요성을 익힐 수 있다고 한다.

▲아키타현 민속의 보고로 자리 잡은 민속예술연구소의 고다시마소장과 함께

농촌 일을 돕는 한편, 연극도 보고 민속춤도 배우다 저녁에는 호텔 온천에서 피로를 풀도록 하는 와라비 예술촌의 프로그램이 부러웠다. 일본도 대학입시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만큼 심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카이가 대표는“일본 청소년 정서의 황폐화로 학교교육이 엉망이 되고 있는데‘인간다운 마음’을 학생들에게 불어넣어 주고 싶어서 시작한 게‘와라비자 수학여행’”이라고 설명했다.

국립극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극장이지만 청소년들에게 연중 예술을 통한 인성고양(人性高揚)프로그램 <국립극장 고고고>가 시작된 지는 겨우 2년 밖에 안 되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국악과 연극을 교과서의 내용을 토대로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다. 2009년 하반기에 1만 2000명, 2010년에 4만 7000명이 관람했으니 이제 시작일 뿐이다. 관람학생도 서울시내 초등 · 중등학생이 대부분이어서 전국 학생을 상대로 하는 공연은 방학 때 5,6곳 찾아가는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강원도 산골쯤에 위치한 와라비 예술촌은 역사도 깊지만 도시와 농촌을 연결해 상생(相生)시키려는 예술 공동체의 모델로 돋보인다. 이윤택의 밀양 연극촌과 같은 단체가 하루 속히 발전해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고 지방에서 만든 예술작업이 국내 대도시는 물론 세계의 도시를 누비고 학생들의 주요 수학여행 장소가 될 때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립극장 고고고>는 2009년 착수 때부터 지방의 수학여행단을 유치하려 했으나 여행사에 대한 커미션 제공 문제 등으로 벽에 부딪힌 상태다. 눈 속에서도 공연을 계속하는 와라비예술촌을 보면서 다시 청소년을 위한 공연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