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연기의 거목 - 장 민 호
사실주의 연기의 거목 - 장 민 호
  • 김은균 / 공연전문기자
  • 승인 2011.06.2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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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연극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사상이다. “저희 집안은 황해도 신천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아버지가 장로시고 어머니가 권사셨지요. 제가 둘째 아들인데, 학교는 재령 명신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97년 파우스트에 출연하여 열정적인 연기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장민호 선생님

그러니까 주로 집은 신천이지만은 자라고 공부하고 한 것은 재령이었어요. 그때는 일제 강점기라 한국말로 공부를 안 하고 전부 일본말로 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한국말을 하면은 벌을 세우던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 왜학을 충실히 받아왔지요.

아버님이 그 지역에 교회를 세우시고 손수 교회를 운영하다 보니까, 또 그 아들인 내가 중학교 다니고 할 때니까 뭐 성탄절이다 그래서 행사를 하지 않습니까? 근데 나는 중학교 다닐 때에 그 교회 강당에다 이제 뭐‘축! 크리스마스’이렇게 써서 붙이기도 하고 간단한 성서에 관한 얘기를 연극으로 꾸며가지고 토막극 같은 것을 어른들과 같이 하면서 그런 작업을 한 것이 말하자면 연극 계통으로 발전할 수 있는 씨앗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선생께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게 된 것은 대학진학을 위해서 서울로 오게 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배우양성소인 조선 배우학교에 입학하면서다.“서울에는 마침 친척 되는 고모님 댁이 계셨고, 또 사촌형이 있었고, 그래서 생활도 편했고. 그래서 와서 대학 진학을 하려고 서울에 왔다가,

삼팔선이 점점 굳어지고, 이제 왕래가 불편해지고 차차 또 완전히 뭐 막히다시피 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공부는 해 보겠다는데 벌이가 안 되니까 학비 조달이나 여러 가지가 불편해서 고민하던 중에 그 마침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현철 선생이라고 우리 신극계의 말하자면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는 일본서 전부 공부하고 오신 그런 분이 그 최초로 인제 그 서울역 앞에다가 조선배우학교라는 것을 세워가지고 개강을 시작해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연기교육 시스템이 전무했던 시절에 배우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조선배우학교는 지금 서울역 앞에 대우빌딩 그 자리에 빨간 벽돌집 삼층인데 그 학교가 이층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연극수업은 현철 선생이 혼자 다 하셨어요. 그러니까 몇이 없고. 뭐 그 이론적인 거 뭐 하여간 세계연극사, 동양연극사, 무슨 연출가, 연기론이라든가 또는 실습이라든가 전부 혼자 하셨어요. 

근데 그때 당시에 그 현철 선생께서 가르치는 교수 방법이 굉장히 훌륭했어요. 그리고 아주 박식하셨고 철저하게 공부해 가지고 오셔 가지고 그 분한테 실습 받을 때 제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라는 연극도 하고, 무슨 <결혼조건> 뭐 여러 가지 작품들 했는데, 제가 그때 오스카 와일드, 요한 역을 맡았어요. 제 소리가 좋고 정확하게 전달이 된다고“아, 너 장민호가 젤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깐 당시에 현철 선생의 교육방법이 퍽 훌륭했다는 생각이 듭니다.”기록으로 남겨진 선생의 데뷔작은 1947년 <모세>라는 작품을 통해서이다. “길거리 지나다가 <모세>라는 성극을 하는데 모세 주인공을 모집한다고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합격이 되어 작품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청년들이 모여서 하는 단체였는데 그 리더 격이 이보라 씨였어요.

그 분이 배우도 하고, 현대극장에서 주연도 하고 그랬는데 인제 배우 집어치우고 극단, 종교인들 모아가지고 극단을 만들어서 연극 활동을 하였던 거죠. 교회연극의 부흥을 위한다고나 할까? 작가도 교인들이 작품을 쓰고.  그래 가지고 제가 고향에서도 부모도 기독교인이고 그러니까 그런 인연이 자연스럽게 맺어지면서 또 오디션 봐 가지고 합격이 되서 첫 번 출연이 주연으로 픽업되니까 굉장히 영광스러웠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