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한국 공예문화의 발전과제 III
[문화칼럼] 한국 공예문화의 발전과제 III
  • 천호선 /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
  • 승인 2011.07.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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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문화의 발전과제를 논의하는데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공예의 장르적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공예와 순수미술과의 관련성이다.

이 문제는 특히 피카소가 도자기를 순수미술의 매체로 활용, 순수 관상용 도자기를 탄생시킨데 이어, 미국의 도예 작가들이 도자를 현대미술의 새로운 매체로 인식하고 독자적인 도자조각을 발전시키면서 제기되었다.

미국 현대도예가들에 의해 시도된 순수 예술도자는 예술의 개념과 조각 장르 뿐 아니라 공예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공예란 무엇인가 하는 존재론적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1981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도자조각 : 6명의 아티스트>전은 실용성과는 무관한 순수 조형 도자를  선보인 전시회로 미술계와 도예계 양측에 미학적, 장르적, 매체적 화두를 던진 중대한 사건이었다.

전통에 기반을 둔 아시아의 용기 중심의 도자나, 공예에 디자인을 접목시킨 유럽의 실용도자와는 다르게 피터 볼커스(Peter Voukos), 로버트 아네슨(Robert Arneson) 등의 내러티브하면서도 표현적인 도자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으로 도자문화의 새로운 세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도자문화가 순수미술로 동화되어 가는 새로운 경향에 대해 미술평론가 존 페럴트(John Perult)는 Soho News(1980년3월5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극단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조각이 되기 위해 실용도자기의 진실성을 희생시키는 것은 도자기의 역사적, 문화적, 대중적, 그리고 미적인 근본을 완전히 저버리는 일이다. 나는 예술과 공예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손으로 만든 화병과 항아리, 접시 등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감동을 줄 수도 있다”.

또한 뉴욕타임즈의 미술평론부장 힐톤 크래머(Hilton Kramer) 역시 펑크조각의 창시자인 로버트 아네슨의 작품에 대하여 허세와 경박함과 자기과시욕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휘트니의 도자조각 전시회는 예술과 공예, 조각과 도예, 조형과 기형의 경계를 허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적 순간으로 기록되고 있다.

공예가 순수미술로 진입하는 매체, 장르의 평준화 현상에 대해 모더니즘 미술이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1979년 시라큐스 에버슨미술관의 <미국도자 100년전> 동반 심포지움 기조연설에서“예술에는 규칙이나 규정 또는 정해진 범주가 따로 없다”고 주장, 공예의 예술적 진입을 옹호하였다.

 또한 미술사가 도날드 커스피트(Donald Kuspit)는 Art in America(1981년1월호)에서 공예로 머물던 도예가 예술 장르로 진입하는 현상을 미술계 계급구조의 붕괴와 연관시키며“숭고한 인간 본연의 표현을 가능케하는 대중적 자료인 흙은 여러 가지 처리법에 민감한 만큼 특유의 변화무쌍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도예는 가장 보편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라고 피력하면서 공예의 대중예술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순수조형을 지향하는 예술도자는 흙이라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매체적 특성으로 대중친화적 예술이 될 수 있다. 예술도자의 활성화를 통해 예술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역으로 도자의 예술적 수준 제고를 기할 수 있다.

특히 실용도자를 현대화하고 예술화하는 작업에 예술도자가 창조적 영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예술도자와 실용도자가 상호 교류하며 시너지를 창출할 때에 예술과 공예의 이분법은 효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특히 영국의 미술이론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가 그의 저서 <The Meaning of Art>(1931)에서 주장하듯이‘도자기는 모방충동이 아니라 추상충동에 의한 최초의 순수예술이자 그런만큼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예술’이라는 논리에 비추어 볼 때 공예와 순수미술과의 구분은 무의미해 진다.

* 본 칼럼은 필자의 제4회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국제도자포럼 기조발제에서 일부 발췌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