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해도 더 편안함이 없으니...”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해도 더 편안함이 없으니...”
  • 임동현 객원기자
  • 승인 2011.12.1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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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현대문학] ‘대한민국 김관식’의 무한도전(2)
<국화 옆에서>, <무녀도>, <등신불>, <사월의 노래>, <물새알 산새알>. 국어 과목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이 제목들은 다 들어봤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밑줄 쫙~’하며 외우고 읽었던 작품들. 50년대 문단에서 어른으로 대접받던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의 대표작들이다.

50년대 문단에서 이들은 평론가 조연현과 더불어서 요즘 표현을 빌면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를
▲ 공초 오상순 시인과 김관식이 나란히 걷고 있는 장면

후배 문인들에게 뽐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집결지 역할을 한 명동의 ‘문예살롱’은 당연히 뜨내기 예술가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곳이 됐다. 대신 그들은 ‘모나리자’나 ‘갈채다방’에서 글을 쓰고 차를 마시고 원고 청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를 말 한마디로 깨뜨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괴짜’ 김관식이다. 대선배인 김동리나 조연현에게 "김군, 술 한잔 사라", "조군, 뭐가 불만인가?"라고 대들고 서정주와 동서지간이 됐어도 여전히 술만 들어가면 “서군!”을 외치고 돌아다니니 소위 '교양있는' 문인들은 그를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

동서인 서정주가 의장으로 있는 모임에서 술에 취해 참석한 김관식은 "의장!"하고 소리치며 횡설수설과 욕설을 남발해 모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어느 해인가는 당시 부총리였던 장기영이 축사를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어이, 자네는 그만하고 내가 말을 좀 해야겠네"라고 나서더니 혀꼬부라진 소리로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그 순간 서정주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앞으로 은단 같은 것은 절대로 먹지 않겠습니다!!”

'大韓民國 金冠植(대한민국 김관식)'. 그의 명함이다. 시인이니 선생이니 하는 직업은 없다. 그저 '대한민국 김관식'만이 있을 뿐이다. 적어도 술에 취한 김관식은 문학인과 교양인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한 '완벽한 자유인'이었다. 소위 ‘순수문학’을 내세우며 점잔을 빼는 문학인들에게 김관식은 술취한 목소리로 ‘빅엿’을 날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에게 늘 '주신(酒神)'이 따라붙어있고 주신이 자신을 돌봐준다고 믿었다. 아내의 걱정에도 그는 늘 술이 있어야 힘이 생긴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술에 취한 김관식이 산길에서 굴러떨어져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오히려 주신이 돌봤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돌아왔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서울상고에서 교사로 재직했을 때도 그는 기행을 일삼았다. 당시 서울상고의 교장은 육당주의자였던 김도태였다고 한다. 국어선생이 된 김관식은 자신의 자리에 '如不手(여불수)'라는 법화경의 한 구절을 써놓았다. 그는 '왕왕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술을 마시러 다닌 것은 물론이고 개를 잡아먹고 심지어 사창가를 가기도 했다.

▲ 드라마 '명동백작'(EBS)에서 괴짜시인 김관식으로 출연한 탤런트 안정훈의 모습

어느 날, 아침부터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김관식에게 교장이 한 마디를 했다.

"김 선생.“
“네엣?”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은단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
“그런데 술냄새와 은단 냄새가 섞인 냄새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우리의 김관식, 파안대소하며 말하길,

"교장선생님, 김관식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앞으로 은단 같은 건 절대로 먹지 않겠습니다!"

김관식을 만든 방옥례의 눈물

이렇게 주구장창 술을 먹어대고 기행을 일삼으니 자연 생활이 나아질리가 없었다. 외상술값으로 월급을 다 날리고 빈 봉투로 돌아오는 남편을 좋게 볼 아내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옥례는 끝까지 김관식을 버리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난 당신의 개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아침에 나간 김관식이 저녁에 결국 '왈왈' 짖어대며 당신의 개라고 말해도 넘어가야했던 방옥례였다. 문학인의 탄생에는 이처럼 바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했던 한 여인의 눈물이 숨어있었다. 그의 호방함과 철딱서니없는(?) 가장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가 있다.

虎皮(호피) 위에서

해 진 뒤, 몸 둘 데 있음을 神에게 감사한다!
나 또한 나의 집을 사랑하노니
自助勤勞事業場(자조근로사업장)에서 들여온 밀가루 粥(죽)이나마 延命(연명)을 하고
호랑이표 시멘트 크라푸트 종이로 바른 방바닥이라
자연 虎皮(호피)를 깔고
騎虎之勢(기호지세)로 傲然(오연)히 앉아
韓美合同(한미합동)! 友情(우정)과 信賴(신뢰)의 握手(악수)표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일망정
行(행), 住(주), 坐(좌), 臥(와)가 이에서 더 편안함이 없으니
王(왕), 候(후), 將(장), 相(상)이 부럽지 않고
白堊館(백악관) 靑瓦臺(청와대) 주어도 싫다
G,N,P가 어떻고
그런 神話(신화) 같은 얘기는 당분간 나에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김관식, <다시 광야에>, 창작과 비평사

마치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별일 없이 산다>처럼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소리치는 듯한 그의 시다. 밀가루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시멘트 종이를 깐 바닥에 밀가루 포대로 이불을 만들어 덮어야하는 빈한한 삶. 하지만 그는 그것을 '자연 호피를 바닥에 깐 한미합동'이라는 이름으로 희화화하고 어려운 한자를 써가며 호방함을 과시한다. 물론 그 호방함이란 결국 자신의 비참함을 숨기기위한 도구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김관식은 교사와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지내지만 그 모두를 결국 그만두고 만다. 그리고 4.19 혁명 직후 김관식은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다. 다음 편에 그의 ‘무한도전’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