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인터뷰-임권택 감독 ①]“동양만의 유장함과 거기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 담아내고 싶었다”
[스페셜인터뷰-임권택 감독 ①]“동양만의 유장함과 거기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 담아내고 싶었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03.21 13: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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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作 ‘만다라’, 최근 다시 세계로 배급하자 제의 받아

 

     임권택 감독. 그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기분 좋아 자꾸 되뇌게 된다. 꽃샘추위 온데 없는 봄날 따스함에 마치 봄바람 난 여인처럼 기자는 괜스레 가슴이 떨리기도, 한편으론 초조하기도 했다. 그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2011) 이후 별다른 소식을 듣지 못해서일까, 약속장소로 향하는 기자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땀까지 나려고 하던 찰나, 저기 거장이 보인다. 건강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아주는 그를 보니 왠지 모를 안도가 들었다.
     1930년대에 태어난 그는 지난한 한국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성장했다. 일제 해방부터 이념대립,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그저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그때에 꿈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당시엔 변변한 영화관도 없었거니와 영화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중학교 중퇴 후, 집을 나와 부산에서 막노동을 하며 바람에 휩쓸리고 물길에 치이듯 우여곡절을 거듭하다 그가 ‘어쩌다보니’ 이른 곳은 바로 충무로였다. 영화에 죽기 살기로 뛰어든 많은 이들 사이에서 ‘밥은 굶지 않겠지’란 막연한 바람으로 끼어든 그는 그들 사이에서 엉뚱한 청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본래부터 정해져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어린 나날들의 끔찍한 경험들은 오늘날 그의 영화에 향기로운 양분이 돼 주지 않았던가. 소품부 심부름꾼에서 조감독을 거쳐 감독에 이르기까지… 올해로 그는 영화인생 51주년을 맞았다. 우리전통, 우리아름다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임권택 감독. 그를 지난 15일 용인 자택 근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하던 도중 “진실만을 말한다’”라며 마치 법정 선서를 하듯, 진지하고도 정성스럽게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그의 말과 진지한 눈빛에서 다시 한 번 거장의 면모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음은 거장과 나눈 일문일답.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특별한 일 없으면서도 괜히 바쁘네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신세진 사람들도 많고 하니 여기저기 참석할 곳도 많고… 또 주변에서는 영화 새로 개봉했다며 보러 오라 하기도 하고요. 다른 분들 영화 보면 재미도 있고 배울 점도 많아 챙겨가고… 그렇게 지내고 있네요”

-한번 흥행했다 싶은 작품은 엄청난 관객 수를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분명 돈도 많이 버셨을 것 같습니다.
“영화감독만해서는 돈 벌기가 수월치 않습디다. 지금까지도 은행에 많진 않지만 조금씩의 신세를 지고 살아오고 있어요. 참 부끄럽네요. 그렇게 많은 영화를 찍었고 그 중 몇 편은 엄청 흥행했음에도 이렇다는 게… 저도 그렇고 집사람도 돈 관련해서 요령이 전혀 없었던 거죠. 어차피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가난 때문에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기에 제가 영화감독이라는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국내최고 영화감독으로서 해외에서도 인정받으며, 올해 영화인생 51년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동안의 소회를 말씀해주세요.
“아까 재산이 많이 있냐는 질문을 하셨죠. 제가 만약 재산이 좀 있었다면 오늘날까지 영화감독으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직접 제작도 해보려 했을 테고, 이것저것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졌겠지요. 연출자란 비록 자신의 일에 턱걸이로 겨우 버티고 있을지언정 그 안에서만큼은 애쓰면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게 유지가 되죠. 전 큰 재산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영화감독으로 살아남아 있는 거예요”

-어떤 계기로 우리전통문화를 영화로 담아내기 시작하셨나요?


“60년대 영화는 대부분 우리 삶과는 무관한 얘기로 모두 미국영화 아류였어요. 저는 미국영화 흉내 내기는 가망 없는 야망이란 생각이 들었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류가 아닌 ‘한국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한국영화 말입니다. 더 이상 거짓말이 아닌 우리네의 삶과 우리만의 문화적 개성을 그려내자고 다짐했죠. 물론 미국영화에 비해서는 세련미가 상대도 안됐지만 아류보다는 개성적으로 보이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어요. 동양만이 갖는 유장함과 거기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먹었다고 바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의 개성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10년은 족히 걸린 것 같네요. 그런 영화들이 바로 ‘만다라’나 ‘족보’에요”

 

-당시 감독님께서 탁월한 선견을 하셨던 거네요.
“제가 천재도 아니고, 단지 한국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그 결심을 빨리 한 사람이었을 뿐이죠. 그게 바로 저를 살린 거 아니겠습니까. ‘만다라’를 81년에 촬영했는데, 지금 세계에 다시 배급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영화라며, ‘만다라’ 재배급 제의를 작년에 받았어요. 세계 어디를 가도 동양영화를 교육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만다라’를 보여줍니다. 또 ‘만다라’가 고전으로 남아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고요. 하지만 30년 전의 영화를 지금도 세계에 배급할 수 있고, 배급하자는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입니다. 굉장히 고무적이고 의미 있는 일이지요. 제가 평생 미국영화아류나 찍었다면 ‘만다라’같은 영화는 영영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승려들의 삶을 거짓 없이 담아낸 노력이 있었기에 그 진심이 지금도 통하고 있는 거예요. 전 여전히 제 영화에 불만도 많지만 진솔한 삶을 담아냈다는 것이 허망한 일이 아니란 걸 새삼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니 감독님께서는 일찍이 한류를 일으킨 주역이셨네요.
“예전에는 유럽의 영화제들에 가보면 한국 영화의 위상이란 건 아예 존재하질 않았어요. ‘만다라’부터나 베를린 영화제에서 좀 알려지기 시작한 거죠. ‘만다라’ 재배급 제의를 했던 분이 저에게 말하기를, 제 영화에는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들이 도처에 있다며, 마치 박물관 같다고 표현하더군요. 이것 역시 거듭 강조하지만 아류영화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감독님 영화중에도 흥행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작품이 몇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는 지요.
“흥행이 안 되면 당연히 고민하죠. ‘춘향뎐’을 예로 든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춘향이는 너무 뻔한 소재였어요. 관심 가질만한 영화는 아녔을 겁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특히 미국 배급에서 성과가 좋았고, 칸 영화제에서는 본선도 진출했죠. 미국 실험영화의 대부, 스테인 브리키지는 ‘춘향뎐’ 관람 후, ‘춘향전은 세계명작 중 하나’라며, ‘처음엔 판소리가 생경했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했어요. 지금까지는 우리 한국인들끼리만 춘향전을 즐겨왔지만 ‘춘향뎐’ 이후로 이젠 세계인과 공유하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정작 국내 흥행 면에서는 전혀 성과가 없었기에 홍보를 잘못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곤 해요. 뭐, 이건 제가 아쉬워서 하는 소리이고…”

-지금까지 101편을 작업해 오셨는데, 그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101편을 작업해 오셨는데, 그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요?“저 스스로는 대표작으로 내세울만한 작품이 없다고 늘 말해왔지만 객관적 성과로 본다면… ‘씨받이’는 국내 평단에서는 무시됐던 작품이지만 8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수상 은 물론 약 십여 년이 지난 후 까지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있는 걸 봤어요. 얼마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지 필름에서 비가 마구 내리고 있더라니까.(웃음)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 달쯤 지났을까요. 샌프란시스코 영화제로부터 상패 하나가 왔어요, ‘관객이 뽑은 인기상’이라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 필름이 지금까지도 인기를 유지한다는 게 저에겐 참으로 뜻 깊었죠. 또 ‘춘향뎐’이 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 본선 진출을 계기로 세계 각국으로 배급이 되는데, 나중에 배급 관계자를 만나 얘기하던 중에 그가 ‘덕분에 돈 꽤나 벌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듯 수상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 상이 주는 파급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해요. 2003년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 걸작’ 선정에 있어서, 심사위원들이 판소리에 압도적으로 보낸 지지는 바로 ‘서편제’에서의 ‘득음 세계를 향한 한국인의 모습’ 때문이었다고 해요. 심지어 영화에서 득음을 위해 눈을 멀게 하는 장면을 보고는 실제로도 저런 가혹행위가 허용되는 건 줄로 알고 염려하면서도 판소리를 ‘세계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했다고 하더라니까.(웃음)”

 

-내세울 작품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특별히 소중한 작품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있어요. 바로 ‘장군의 아들’이에요. 내세울 만한 작품은 없다고 했지만 ‘장군의 아들’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장군의 아들’의 흥행 성공 이후, 저는 ‘서편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런 소재의 영화를 제작해줄 제작사는 그 어디에도 없을 시대였습니다. ‘장군의 아들’로 꽤 많은 돈을 번 태흥영화사는 큰 돈 들이지 않고 제작할 수 있는 ‘서편제’까지도 흔쾌히 함께 해주었고 ‘서편제’는 그렇게 탄생해 예상치 못한 ‘서편제 붐’을 일으키게 되죠. 그런 것들이 다 서로 맞물려 ‘서편제’가 만들어진 거라, 그런 면에서 ‘장군의 아들’이…”

-스물다섯, 어린 나이의 감독 생활에 힘든 점도 많으셨을 듯한데…
“어려보이는 친구가 이래라 저래라 시켜서 그런지, 연기자들이 말을 되게 안 들었어요. 오라고 그러면 느릿느릿 빼고… 그래서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사람들 많이 모여 촬영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계속 ‘NG!’라고 외쳤어요. 배우들은 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며 와서 따지는데, 저는 또 나름대로의 이유를 댔죠. 계속 ‘NG!’를 외쳤더니 결국 배우들이 제가 ‘꼬장’부리고 있단 걸 눈치 채곤 그 이후부턴 제 말을 아주 잘 따라주던데요.(웃음)”

■[스페셜인터뷰-임권택 감독 ②]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