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우리 술에 담긴 문화와 철학(1) - 감홍로, 한 여름에 속을 덥히는 이열치열
[기획연재] 우리 술에 담긴 문화와 철학(1) - 감홍로, 한 여름에 속을 덥히는 이열치열
  • 고무정 기자
  • 승인 2013.07.25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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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배주와 함께 품격 높은 약주

 

한국인은 세계 상위를 다툴만큼 술 소비가 매우 높다.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술이 요사이는 남녀 구분없이 ‘희노애락’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기호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술을 마시는 데에 있어, 대부분 같은 주종(酒種)만을 반복해서 마신다는 것이다. 1909년 일제가 주세법을 발효해 우리 술의 제조와 판매를 제한하기 시작한 이후로, 1927년 통합된 곡자제조회사를 통해 일정한 누룩만을 쓰도록 하거나, 1954년 발효된 양곡관리법 등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가양주 문화는 물론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주 역시 그 뿌리가 뽑히게 되었다. 이렇게 잃어버린 우리 술의 빈자리에 현재는 외국의 술이 들어앉아 대신하고 있다.

그 덕에 일상적으로 마시는 술이라곤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주정에 물을 섞은 희석식 소주나 아스파탐 등의 합성감미료를 첨가한 막걸리, 맥아가 없다시피 하는 국산 맥주에 불과한 것이다. 혹은 특별한 날에 와인이나 양주, 칵테일을 찾는 것도 안타깝다. 우리 조상들이 명절이나 특별한 날 집집마다 담아내던 가양주 중에 와인이나 양주 등 서양 술에 못지않게 상당한 가치가 높은 것이 많다. 좋은 곡식과 약재 등을 써서 기분을 돋우는 낙주(樂酒)로서 만이 아니라 기운을 북돋우는 약주(藥酒)로서의 기능도 높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우리의 술들이 전국 도처에 얼마든지 있지만, 대중의 관심과 흥미가 없는 이상 그 술로 '우리의 문화'를 형성할 수가 없다. 하나의 전통을 잃는 것은 그 속에 깃든 철학과 사상을 함께 잃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술의 가치를 알리고자 본지 <서울문화투데이>는 앞으로 3회에 걸쳐 '우리 술 기행'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감홍로-영롱한 붉은 이슬 속 가득한 여덟 향기에 뒤따르는 달콤함까지

1946년, 한국 민속학의 권위자 겸 작가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전주의 이강고, 정읍의 죽력고와 함께 평양의 감홍로를 조선 3대의 명주로 뽑았다. 한국의 전통주는 로(露), 고(膏), 춘(春), 주(酒) 로 격을 매긴다. 조선 3대 명주 중 로(露)의 격을 지닌 것은 감홍로뿐이니 그중에서도 감홍로가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겠다. 감홍로의 명성은 육당 최남선이 언급하기 이전에도 실로 대단해서, 별주부전(한국의 전래동화)에서는 거북이가 토끼를 꼬드길 때 '용궁에 가면 감홍로가 있다' 고 회유하는 대목이 있다. 또한 더 높은 관직을 주려는 제안도 '감홍로 때문에 못 떠난다' 며 거절했다는 평안 감사의 일화도 전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춘향전(한국의 전래동화)에서는 춘향이가 이몽룡과 이별하는 장면에서, 향단이에게 이별주로 감홍로를 가져오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이별에 대한 순응의 뜻으로 술을 가져오라는 것이 아닌, 이몽룡이 취하게 만들어 이별을 하루라도 늦추려는 여인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몽룡을 취하게 만들려는 술답게, 40%의 높은 도수를 자랑한다. 취재 중 감홍로를 살짝 맛만 보았을 뿐인데도 취기가 감돌았다. 첫 맛엔 성질이 활달한 계피향이 강하게 치고 올라왔으나, 곧이어 다른 약재들의 향과 은은한 단맛이 미뢰를 감싸기 시작했다.

▲ 화덕식 증류방식을 사용해 술을 내리는 감홍로

감홍로는 본디 용안육, 정향, 진피, 계피, 생강, 감초, 지초의 일곱 가지 약재가 들어간 약용 소주다. (최근 식약처가 방풍을 약재로 분류하는 바람에 감홍로에서 제외됐다) 이중 용안육, 계피, 감초에서 나는 단맛(甘)과 지초가 내는 붉은 빛(紅)의 특징을 담아내 술의 이름이 감홍로가 되엇다. 궁중에서는 발생한 병이 약을 끓일 만큼의 시간도 없이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일 때 약 대신 급히 감홍로를 처방하곤 했다. 본래 술은 체온을 높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내장 기관을 냉하게 만든다. 그러나 감홍로는 약재의 성분이 속을 따뜻하게 만들어 막혀있던 기와 혈을 뚫어준다. 한의학에서는 내장기관에 암이 생기는 것은 냉한 기운이 뭉쳐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그러한 이유로 감홍로가 암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기도 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2010년 5월에 발간된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에서 감홍로 제조에 사용하는 약재 침출액들의 항산화 작용에 대해 다루었을 만큼 약리작용이 뛰어난 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감홍로 명인 이기숙씨가 술을 빚기 위해 술밥을 만들고 있다.

감홍로는 문배술과 함께 평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술이다. 6.25 전쟁 때, 평양에서 문배술 양조장을 하던 故이경찬 옹이 월남함에 따라 감홍로와 문배술의 기법이 들어왔다. 그러나 1954년, 한국정부는 쌀로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을 시행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가양주 문화는 쇠퇴기를 맞이한다. 이러한 와중에도 故이경찬 옹은 몰래 감홍로와 문배술을 빚어 전통을 지켜왔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후, 대한민국 최초 술 관련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이경찬 옹은 큰아들 이기춘 씨에게는 문배주를, 작은 아들 이기양씨에게는 감홍로 제조 기법을 전수했다. 이경찬 옹이 사망하자 자연히 두 아들은 각각 무형문화재와 식품 명인이 됐다. 술을 남자가 만들도록 하는 전통에 따른 아버지의 뜻에 셋째 딸 이기숙씨는 아버지께 감홍로를 빚는 방법을 배웠음에도 불구, 가정주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 감홍로 명인이던 둘째 이기양씨가 당뇨로 세상을 떠나자, 셋째 이기숙씨가 전통을 잇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기숙씨가 12년만에야 식품 명인에 지정되었으니, 하마터면 조선의 3대 명주 중 하나가 역사 속에서 사라질 뻔한 셈이다.

이기숙 명인은 술을 빚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故 이경찬 옹)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인간문화재로 등재되기까지의 30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술을 빚으며 보아온 아버지의 눈물과 고통이 지금에서 새로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술항아리 옆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지, 왜 그토록 자상한 아버지가 술을 빚을 때만 엄하고 무서운 모습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나와 술을 빚기 시작한 이기숙 명인은 왜 아버지가 그토록 예민하고 무서웠는지 십분 이해한다고 말한다.

▲ 백화점 등에서 시판중인 감홍로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故 이경찬 옹)는 “네가 만든 술이 최고다. 네가 만든 술이 제일 맛있다.” 는 소리를 들으려 종일 그의 아버지 곁에서 술시중을 들었다. 이기숙 명인은 당신의 아버지께 최고의 술을 드리고 싶었다는 故 이경찬 옹의 그 마음을 이어받아 고객에게 최고의 가치를 선사하고자 한다. 이기숙 명인은 고객에게 감홍로 주문 전화가 들어오면, 먼저 술을 보낸 뒤 후불로 돈을 받는다. 혹여 술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 술을 다시 돌려보내고, 입금치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숙 명인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감압식 증류기를 사용하는 다른 양조장과는 달리, 연료비가 많이 드는 화덕식 (상압식) 증류기를 사용한다. 직화 방식인 소줏고리와 가장 유사한 방식이 화덕식 증류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기숙 명인은 후계자 양성에 항상 전전긍긍하는데, 최고의 술을 선사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후계자에 전달되지 않는다면 문화는 다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감홍로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전달받아서일까, 취재를 다 마치고 나서도 오래 전에 마신 감홍로의 잔향이 입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