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본래 감각이란 질을 포함한 정서emotion(흥분, 이완, 긴장, 초조, 두려움, 기대, 애정, 분노 등등)와 그 강도이며, 에너지와 그 유형이며, 정서적 강도가 패턴화 되면 진동이고 파장이다. 그래서 본래의 감각은 더 흐릿하지만 직접적이고 무거운 정서이다. 빨강, 파랑, 매끄러움 등의 성질로서의 감각은 본래의 감각에서 질만 추상해 낸 것이다.
그러나 질과 정서적 강도는 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이 성질로서의 감각, 즉 추상적 감각을 구체적인 감각, 즉 정서와 강도, 에너지로서의 감각으로 되돌리려고 한다. 신체를 여과하도록 하는 것이 그 방법 중 하나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 감각은 주로 사건으로서의 신체에 매인다. 감각이 신체에 매인다는 것은 다시 감각을 억압하는 것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신체는 우리의 가장 일차적이고 가장 직접적인 환경이며, 우리의 역사이며, 기억이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모든 가능성의 원천이다.
이 신체적 감각은 거리두기가 아니라 몰입을 요구한다.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감각들의 정서적 패턴과 대비, 흐름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신체적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눈과 관념으로 보지 말고, 우리의 신체의 울림과 맥동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은 추상화된 감각, 성질이나 도식으로서의 감각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서적 감각으로부터 끌어올린, 다시 말해 신체적 감각에서 건져 올린 상상력의 시대라 규정할 수 있다. 오늘날의 상상력은 바로 이 구체적 감각들로부터 유래한다. 아래의 그림들은 바젤이 보여준 물질과 신체로 향하는 감각의 모험과 그 여정의 기록들이다. 잠시 감상해 보자.
이러한 감각들로부터 포착된 세계 내지 실재는 선명하지도 않고 전체를 통일하는 게슈탈트로도 잡히지 않는다. 그 세계는 생성 중인 질서로서의 카오스와 창발적 복잡계에 가까운 것이다. 그 질서는 우리에게 열려있다. 그것들은 그것의 통일을 우리와 우리의 신체에 떠맡긴다. 티핑 포인트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지 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 자체로 잘 조직화되고 완전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고전작업이나 구성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모던 아트와 동시대 바젤의 차이다. 예술은 구체적 감각과 추상적 감각의 사이에 있다. 고전주의가 보다 추상에 가까운 감각을 사용한다면, 낭만주의는 보다 구체적인 감각을 추구한다. 바젤의 작품들, 동시대의 작품들은 어느 시대보다 가장 구체적인 감각에 다가가 있다.
이것이 바젤이 보여주는 동시대성이다. 이 차이는 정확히 대표적 미니멀 아티스트였던 솔 르윗의 60년대 작품과 2001년의 Irregular Grid 사이에 놓인 간극, 그리고 프랭크 스텔라의 60년대 작업과 80년대 작업 사이에 있는 차이이다.
자연이나 인간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다. 바젤에도 자연과 인간의 형상이 다수 등장한다. 아마 반 이상일 것이다. 사회학적 해석, 존재론적 해석 모두 가능하다. 자연과 인간이 동시대의 사회적, 존재론적 환경과 그 실존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먼저 자연과 인간, 실재가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어떻게 포착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하는 것이고, 어떻게 우리들에게 전달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술가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다. 아니 그들이야 말로 우리와 다르게 감각의 본래 모습을 알고 그것을 다룰 줄 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술가인 것이다. 그들에게 감각은 성질이 아니라, 정서이며 약동하는 에너지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성질로서의 감각의 패턴과 대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구체적인 수준에서 정서와 강도로서의 감각의 대비나 구성을 창조해 낸다.
그러나 예술가들에게도 시대의 한계는 있는 법이다. 동시에 그들은 동시대의 예술에서 환경에서 그들의 감각의 모험을 마음껏 감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났다. 오늘날 그들에게 주어지는 예술적 강령이란 아마 ‘감각의 모험을 감행하고 감각을 확장하라’일 것이다. 구체적 감각으로 포착된 인간, 자연, 실재는 흐릿하게 포착된다. 왜냐하면 추상 이전의 강도란 단지 육중하고 모호한 다수로만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명석판명한 것들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바로 우리 신체의 여러 가능성들과 연관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질로서의 감각은 단지 우리의 지성과 눈에 작용하지만, 정서적 강도로서의 감각은 우리의 신체를 경유한다.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감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성질로서의 감각은 얕은 깊이만을 가질 뿐이며, 단지 눈의 즐거움만 줄 뿐이다.
그러나 정서적 강도로서의 감각은 보다 근원적인 곳에서 연관의 가능성을 이끌어 낸다. 연관의 가능성은 폭이 되고, 폭은 깊이가 된다. 이제 오늘날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 감각의 차원에서 우리에게 폭과 깊이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 보다 근원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풍부한 시사와 울림을 주는 것들이다. 아래의 인간 형상들에 칠해진 색들이 어떤 류의 감각과 정서들을 주는지 잘 느껴보라. 그 감각들이 정서적 강도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림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컨대, 쟝 샤오강의 조각을 보라. 이 아이가 당신에게 정서적으로 다가왔는가(놀람, 끔찍, 상처받음, 불안, 언캐니 등등), 아니면 분홍색의 헐벗은 어떤 아이로 다가왔는가?
예술은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성질로서의 감각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몽드리앙은 그런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질적인 대비이고, 그래서 보다 지적이고 형식적인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몽드리앙에서 깊이를 논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동시대의 예술은 비록 흐릿하고 무겁고 붙잡기 어렵지만, 정서로서의 구체적이고 근원적인 감각을 통해 명제를 환기시키려한다. 예술은 주어진 사물들에서 그 사물들이 달리 될 수 있는 이야기(명제)를 찾으려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달리 될 수 있는 이야기, 즉 상상력의 원천이 오늘날은 구체적인 감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젤은 그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근원에서 작동하는 감각은 그만큼 풍부한 시사와 연관을 가져온다.
우리가 예술에서 현시되는 것 너머의 무엇을 보거나 느끼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구체적 감각에서 퍼 올린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깊이’는 이 구체적 감각에서 유래하는 것이지 추상적 성질로서의 감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깊이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것은 폭과 균형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예술의 깊이나 그 너머라는 환영이 작품 그 자체나 또 다른 초월적 세계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것이다. 깊이나 그 너머의 것은 실상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감각과 우리 자신의 신체에 말이다.
누군가 어떤 아가씨의 파란(성질) 눈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정서적 강도)을 느꼈다면, 거기에 빠져들 듯한 기분(깊이)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가 아주 어린 시절 파란 눈의 엄마에게서 느꼈던 사랑의 정서, 그 정서로서의 감각과 충동이 우리의 신체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에 대한 보다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려 한다. 그림 둘이 그것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방식으로 느끼지 않았고, 늑대 그림을 ‘붉은 색으로 칠해진 늑대’로 받아들인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단지 그것뿐일 것이다.
또 단순한 알파벳 대문자 ‘I’가 자화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어리둥절할 뿐이며, 남은 것은 ‘현대미술은 어려워, 사기 같아!’라는 빈정거림뿐일 것이다. 왜 그것이 단순한 늑대가 아니고, 왜 그것이 단순한 대문자 I가 아닌지는 당신이 감각의 비밀을 아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렸다. 이것이 아트 바젤이 당신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예술이 구체적인 감각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 하는지 안다면, 다음 번 바젤, 아니 다른 어떤 전시장을 가건 당신이 길을 잃는 법은 없을 것이다. 당신이 비록 미술사도 모르고 또 전문가도 아닐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