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꽃잎 점을 치는 순백의 영혼ㆍ 지젤(Giselle)
[김순정의 발레인사이트]꽃잎 점을 치는 순백의 영혼ㆍ 지젤(Giselle)
  • 김순정(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
  • 승인 2015.04.1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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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정 성신여대 무용예술학과 교수/김순정발레단 예술감독/한국발레협회 부회장/한국예술교육학회 부회장/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어느 덧 학교 뒷산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 사이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목련을 보면서 지젤이 떠올랐다. 목련의 처연한 흰 꽃잎이 지젤의 휘날리는 긴치마(로맨틱 튀튀)를 닮았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지젤의 순백 이미지는 누구라도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지녔다.

중학 시절인 1975년 장충동 국립극장 지하 연습실에서 우연히 국립발레단 <지젤> 리허설을 보게 되었다. 그날은 지젤역 진수인과 알브레히트역 이상만의 연습 일정이 있었다. 자신이 버려졌음을 알게 된 지젤이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주저앉아 사랑의 꽃잎 점을 치는 장면이었다.

짝수로 떨어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홀수라면 사랑이 깨진다는 꽃잎 점. 당시 중학생이던 내겐 춤을 잘 추는 것보다 이 장면 자체가 가장 중요해보였다. 초점 없는 멍한 눈빛의 지젤과 그녀를 애처롭게 내려다보는 알브레히트의 표정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이 봄에 더욱 새롭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레작품의 하나로 지젤이 손꼽힌다. 1841년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지젤은 프랑스 낭만주의를 집약한 작품이다. 파리에서는 반년 뒤 잊혀지고 1924년 재상연까지 80년간 상연되지 않았다. 하지만 초연 이후 영국, 덴마크, 러시아에서는 인기리에 상연되었다. 아돌프 아당(1803~1856)의 뛰어난 음악은 이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이어지는 발레음악계보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지젤>은 음악의 아름다움 외에도 첫 주역을 맡았던 그리시의 테크닉과 마임(극적연기), 시적이며 연극적인 장 코랄리와 쥴 페로의 안무 등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획기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지젤역을 맡기 위해서는 춤과 마임(극적연기)에 능해야하는데 이는 프리마 발레리나의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내가 본 최고의 지젤로는 린 세이모어가 있다.

대학시절에는 지젤 등 발레 작품의 비현실적인 스토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한때 발레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뒤늦게 발레 작품들이 당시의 사회상을 리얼하게 혹은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좁은 소견으로 하마터면 좋아하는 발레를 영영 잃을 뻔 했던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과 2015년 현재의 사람들이 외관은 달라졌어도 원형질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분을 속이고 시골 처녀 지젤에게 사랑을 약속한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 앞에 예기치 않게 약혼자인 바틸드 공주 일행이 나타난다. 당황한 알브레히트는 바로 지젤을 외면하고 한 때의 불장난이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사랑의 약속을 잊은 듯이 행동한다.

2005년인가 유니버설 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이 내게 약혼녀 바틸드공주 역을 제의했고, 그 후 바틸드로 유니버설발레단 무대에 몇 번 선 적이 있다. 당시의 지젤은 문훈숙 단장의 세심한 지도로 급부상하고 있던 김세연과 황혜민이었다. 무대에서 바틸드가 되어 지젤을 바라보니 이전의 <지젤>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누구라도 아당의 음악을 들으면 1막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발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전원풍경이나 사실적인 정경을, 2막에서는 낭만발레의 표상인 새하얗고 몽환적인 느낌, 윌리(정령)들이 전개하는 초현실적 세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특히 군무 그리고 남녀 주인공의 파드뒤(2인무)와 솔로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2막을 보다보면 내 몸도 가볍게 느껴진다. 이유는 바로 포인트슈즈, 즉  토슈즈 기법의 신비로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레의 상징이랄 수 있는 이 기법에 통달하기 위해 전 세계의 여성 발레무용수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연습을 거듭하고 있다. 봄 날 작은 바람에도 흩날리는 꽃잎처럼 곧 사라져버릴 운명을 알면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