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충무로야사]-나의 영화계 입문기(김하림군과 나)-
[연재-충무로야사]-나의 영화계 입문기(김하림군과 나)-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09.10.2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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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교수님, 시나리오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문예창작과 첫 강의 시간이었는데,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강의 중인 저명한 소설가 김동리 교수님께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시나리오?”

교수님은 아연한 표정으로 그 학생을 보며 되물었다.

“네, 저는 시나리오작가가 되기 위해 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순간, 수강생들이 와-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놀란 것은 오히려 질문한 학생이었다.

“야! 니들 왜 웃는거야?”

녀석의 대갈일성에 수강생들이 움찔하며 조용해졌다.

“자네, 이름이 뭔가?”

교수님이 학생에게 물었다.

“네, 김공훈입니다.”

“김공훈?!”

교수님은 출석부를 뒤적이시더니,

“음, 문예창작과 학생 맞긴 맞군! 그런데 김 군은 전공 과를 잘못 선택한 거 아닌가? 시나리오를 공부하려면 연극영화과를 지망했어야 했는데….”

수강생들이 또 와-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후일 저명한 시나리오작가가 된 김공훈이 아닌 김하림 군이 순식간에 코미디언(?)이 되는 순간이었다. 쉬는 시간인데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박연수 군이 슬며시 다가와서,

“야! 이무!(필명 이진모) 저기 아까 수업시간에 질문했던 애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자. 짜식 재밌지 않냐?” 하는 것이었다.

박 군은 관악산 모 사찰의 주지승 아들이었는데 요즘 말로 예쁜 동자승 같은 꽃미남이었다. 예의 김공훈 군은 강의실 모퉁이에 있는 어느 예술가의 조각상 아래서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날리고 있었다.

녀석은 아마도 교수님 충고대로 연극영화과로 전과할 것이냐, 아니면 문예창작과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냐 하는, 딴에는 햄릿식 고민을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녀석과 수인사를 나눈 후 장차 대한민국에서 김동리·황순원 선생을 능가하는 유명한 작가가 되자고 삼국지의 도원결의 아닌 캠퍼스 결의를 하며 조각상과 북한산 인수봉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데 김공훈 군은 끝내 시나리오작가가 되겠다면서도 연극영화과로 전과를 하지 않고 문예창작과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 당시 예술대 문예창작과는 교수진이 워낙 권위 있는 저명한 소설가·시인들로 편성되어 있었고 이미 일간지 신춘문예나 유명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동문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에 김공훈 군도 쉽게 전과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고 로빈슨크루소의 표류기와도 같은, 황당하면서 조금은 우울했고 가끔은 유쾌하고 통쾌했던 대학시절이 영화의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처럼 거듭 오버랩되었다.

대학이 있는 언덕 아래로는 정릉천이 길음동 앞을 지나 월계동 쪽으로 찌적찌적 흘러갔고 주변엔 엉성한 판잣집과 대포집이 즐비했다. 개천에는 군데군데 나무다리들이 잔교처럼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는데 우리들은 저 유명한 프랑스시인 아포르네르의 시 구절을 흉내내어 미라보다리를 미아리다리로, 정릉천을 세느강으로 개명하여 ‘미아리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청춘과 대학시절도 그와 함께 흘러갔다’느니 뭐니 하면서 카바이트 술에 취해 자못 기고만장, 환호작약, 의기투합했다.

그 건너편 정릉입구에는 매회 마다 영화 두 편을 동시상영하는 미도극장이 있었고 우이동길 입구엔 미아리극장, 삼양동 쪽에는 대지극장, 세일극장 등이 있었는데 주로 국산영화를 재상영했다. 극장간판이 마치 춘화도 같아서 우리들을 낄낄거리게 만들었다.

그 당시 우리는 공연히 그런 변두리 극장과 국산영화를 백안시했다. 그래서 돈암동 종점에서 전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광화문과 명동으로 진출해 주로 프랑스 뉴웨이브 영화나 이태리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심취했다.

명동과 소공동엔 외국영화 재상영관인 명동극장과 경남극장이 있었는데 요즘처럼 지정석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어서 취향에 맞거나 소위 명화로 일컫는 외국영화를 상영할 땐 하루종일 극장에 늘어붙어서 이미 본 영화를 몇 번씩이나 보고 또보고 해서 거의 영화의 서사 구조는 물론 대사까지도 암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극장이 파하면 그 당시 유명했던 은성주점이나 학사주점 등에서 마치 우국지사나 된 것처럼 시큼한 막걸리와 쓴 막소주를 통음하며 시국개탄을 안주 삼곤 했다.

당시 학사주점이니 뭐니 하는 술집엔 각 대학마다 모든 면에서 소위 전위를 자처하는 친구들이 대표격으로 20∼30명씩 나와 결속했다.

이들은 대부분 학교수업은 뒷전이었고 정치와 이념, 아니면 섣부른 장인의식에 경도되어 있었다. 우리들이 이들과 합류한 것은 특별히 무슨 뜻이 있었던 게 아니고 각계의 유명인사들을 만나기 위한 예비전략이었다.
그 중 김공훈 군은 당시 저명한 영화감독들이었던 유현목·신상옥·홍성기·이만희 등을 만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들은 후일 시나리오작가이며 작사가였던 이진섭, 시인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이봉래, 시인 박인환, 소설가 이봉구 등 소위 명동 백작이라고 일컫는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은성주점 같은 곳에서 가끔 어울렸던 것이다.

그 당시 다른 학생들보다 비교적 주머니 사정이 푼푼했던 박연수 군은 우리들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그러나 그들 저명한 작가나 시인, 또는 영화감독들은 우리 같은 애송이 작가지망생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