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돈조반니와 ‘미투 운동’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돈조반니와 ‘미투 운동’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19.11.25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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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낭만시대 독일 작가인 E.T.A. 호프만(1776~1822)은 1813년 발표한 단편 소설에서 “돈나 안나가 짧은 만남에서 돈조반니의 달콤함을 맛보았고, 그 때문에 돈오타비오에게 끝내 마음을 주지 못했다”고 해석했다. 돈나 안나는 한편으로는 돈조반니에게 복수하고자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충동에 이끌린다. 약혼자 돈오타비오에게 복수를 요구하는 그녀의 1막 아리아 ‘내 명예를 빼앗으려 한 자를’(Or sai chi l'onore)은 깊은 분노와 아픔으로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어둠을 틈타 침입한 치한을, 더군다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사랑한다는 건 요즘 상식에 어긋난다. 하지만, 호프만의 해석을 염두에 두고 이 노래를 들으면 그녀의 슬픔은 더 극적인 떨림으로 다가온다. 돈나 안나의 영혼을 사로잡은 사람이 약혼자 돈오타비오가 아니라 돈조반니였다는 호프만의 해석은 19세기 낭만시대에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돈나 안나 아리아 ‘내 명예를 빼앗으려 한 자를’(Or sai chi l'onore)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https://youtu.be/Wp8UTemmlq8

돈나 엘비라는 돈조반니에게 분노하지만, 그가 위험에 처하면 연민을 느낀다. 고결한 수녀답게 그의 영혼을 염려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돈조반니는 그녀를 점점 더 심하게 모욕하고, 복수과 연민 사이에서 분열된 그녀의 고뇌도 점점 깊어진다. 2막에서 돈조반니가 거짓말로 “회심했노라”며 사랑을 고백하자 그녀는 다시 마음이 흔들린다. 2막 종반에 나오는 그녀의 아리아 ‘고마움을 모르는 이 사람은 나를 속였지만’(Mi tradi quell’alma ingrata)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숭고한 대목이다. “은혜를 모르는 이 사람은 날 속여서 이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오, 신이여, 기만당하고 버림받은 나는 아직도 그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그가 준 고통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의 앞에 닥친 위험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다시 흔들립니다.”

돈나 엘비라 아리아 ‘고마움을 모르는 이 사람은 나를 속였지만’(Mi tradi quell’alma ingrata)
소프라노 키리 테 카나와

https://youtu.be/rMemCQiA-lY

체를리나(Zerlina)는 결혼식 당일의 발랄한 시골처녀다. 돈조반니는 동네 사람들이 축하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서 그녀를 유혹한다. 귀족의 권세를 이용하여 새신랑 마제토와 하객들을 쫓아버린 뒤 체를리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을 요구한다. 유명한 이중창 ‘손잡고 저기로’(La ci darem la mano), 체를리나는 유혹에 저항하지만 은근히 끌리기도 한다. “(돈조반니) 손 잡고 저기로, 그리 멀지 않아요. (체를리나) 원하지만, 원치 않기도 해요. (돈조반니) 저기 가면 “예”라고 할 걸. (체를리나) 가슴이 떨리네요. (돈조반니) 내 사랑, 저기로 갑시다. (체를리나) 마제토가 불쌍해요.” 그녀는 신랑 마제토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네 신분을 바꿔 줄께’라는 유혹에 굴복한다. 체를리나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다”며 돈조반니의 요구에 응한다. 두 사람이 “우리 순결한 사랑의 고통을 해소합시다” 노래하는 대목은 ‘내로남불’의 극치로, 허탈한 웃음을 자아낸다. 

돈조반니와 체를리나 이중창 ‘손잡고 저기로’(La ci darem la mano) 영국 글라인번 오페라
https://youtu.be/GADW9XYoLBY

오페라에서 돈조반니가 가장 탐내며 집착한 상대는 젊고 유쾌한 체를리나였다. 1787년 프라하 초연 당시 제일 인기 있는 캐릭터도 그녀였다. 돈조반니가 등장하면 여자 관객들이 비명을 질렀고, 체를리나가 등장하면 남자 관객들이 휘슬을 불었다고 한다. 당시 관객들이 지금보다 리버럴해 보일지 모르지만, ‘미투 운동’ 관점에서 보면 ‘성인지 감수성’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세 여주인공이 돈조반니를 바라보는 감정의 결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들 모두 돈조반니에게 어떤 형태로든 끌린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돈조반니의 행동은 면책되지 않는다. ‘성인지 감수성’은 한 마디로 사랑 없는 섹스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투 운동’의 제1원칙은 신성한 모성을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돈조반니를 영웅시하는 19세기의 해석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첫 장면에서 돈조반니는 자존심 강한 귀족 가문의 딸 돈나 안나를 속여서 추행하려다 여의치 않자 완력을 사용했고, 소동에 놀라서 뛰어나온 그녀의 아버지 기사장을 살해했다. 새 신부 체를리나를 유혹할 때는 우월한 지위를 이용했다. “농사꾼과 평생 살기엔 아깝다”며 팔자를 바꿔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모든 여성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주장했지만 등을 돌리는 순간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피해 여성들 뿐 아니라 귀족인 돈 오타비오까지 포함한 남성들까지 연대하여 돈조반니를 응징하려 하기 때문에 ‘미투 운동’의 구조를 닮아 있다. 2막에서 돈 오타비오는 악당 돈조반니를 정의의 법정에 세우고 돌아오겠다며, 그 동안 사랑하는 안나의 곁을 지켜달라고 친구들에게 노래한다.

<돈조반니> 중 돈 오타비오의 2막 아리아 ‘사랑하는 안나를 위하여’(Il mio tesoro in tanto)
(테너 박승주, 그레미 젠킨스 지휘 몬트리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https://youtu.be/UK2GJ6cw8XM
 
돈조반니를 정의의 법정에 세우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다. 선남선녀의 추격은 수포로 돌아간다. 2막 피날레 만찬 장면, 살해된 기사장의 유령이 찾아와서 돈조반니에게 뉘우치라고 요구하지만 돈조반니는 끝까지 거부한다. 기사장의 유령은 결국 그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뜨린다. 이 대목은 오페라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장면일 것이다. 뼈에 사무치는 불협화음의 절규, D단조로 얼어붙은 공포와 전율의 무대, 섬찟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기사장과 돈조반니의 대결…. 인간의 힘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없었던 그 시대, 천하의 악당 돈조반니를 심판한 것은 초자연적인 유령의 힘이었다.

<돈조반니> 2막 기사장의 심판 장면 (리카르도 무티 지휘 빈 슈타츠오퍼 1999년 공연)
https://youtu.be/RzQMtnjiceY

니체는 “음악이 없는 삶은 오류”라고 갈파했다. ‘문사철’ 뿐 아니라 음악도 인문학의 영역이라면, 음악의 대향연이자 인간성의 대파노라마 <돈조반니>는 변함없는 고전으로 사랑받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돈조반니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대신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 섬세한 감정 변화, 어두운 열정, 단호한 용기를 모두 음악으로 표현해 놓았다. 이 오페라에서 돈조반니의 아리아는 아주 짧은 두 곡 뿐이다. 하지만 돈나 엘비라, 돈나 안나, 체를리나와 함께 부르는 앙상블에서 그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음악적 조화를 이끌어 낸다. 윤리와 인습의 잣대를 떠나 돈조반니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모차르트 오페라, 그 위대성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시대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돈조반니를 영웅으로 미화하는 입장은 불가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미투 운동’ 앞에서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닐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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