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시 봉평동 미륵산 자락에 자리잡은 전혁림 미술관(관장 전영근). 통영 비진도 해수욕장 은빛 모래 백사장과 욕지 앞바다의 맑고 밝은 코발트 블루빛 바다인 자연을 이곳으로 모신 듯하다. 혹자는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연상하지만 멀리 갈 필요 없다, 바로 통영이다. 코발트 블루는 쪽빛 한술에 청색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일어나는 가장 자리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체는 통영항서 저녁 해가 지고 난 3,4분 후 그 찰나인 색. 바다를 감싸 도는 짙은 푸른색이 바로 통영의 전설 코발트 블루이다. 전혁림 미술관을 매번 찾을 때 마다 행여나 화백의 그림 그리는 작업에 누가 될까봐 발걸음도 사뿐,숨소리도 멎은 듯 한 관람은 비단 모든 방문객들의 모습이다. 아드님인 화백 전영근 관장은 2003년 5월 11일 개관전, 단지 4개월간의 밤낮을 안가린 짧은 시간동안 아름다운 전혁림미술관을 건립했다.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했듯이 통영은 화가 ‘전혁림‘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한다. 천수(100세)를 내다보는 전혁림 화백은 자연으로 닮아 가는 선구자이자, 통영의 바다와 전통 오방색(청,백,적,황,흑)을 영감으로 한 우리 전통 문화유산을 세계적 현대 미술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 자나 깨나 통영풍광이 눈에 선∼하고 저걸 어떻게 다 그릴까 하는 생각뿐이야. 시시각각 변하는 통영바다가 내 그림의 원천이라 할 수 있지”이토록 전 화백의 삶에 통영의 섬,바다,하늘은 분명 활력을 여전히 불어 드리고 있으리라. |
전혁림 화백의 그림 한 폭에는 통영의 모든 것이 담겨 있고 전혁림 화백 그림이 통영이고 통영 앞바다의 자연적색이 코발트 블루다.
전혁림 화백(95세)은 한 세기를 지나 한국현대사의 격동기(일제시대,한국전쟁등)와 다양한 문화 변동을 살아낸 이 시대의 위대한 현역 화가이다.
1915년 9월 17일생(음력)인 전혁림 화백은 경상남도 통영군(지금의 통영시) 무전리 478번지에서 전계주(全繼柱)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산(慶山). 이후 통영공립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통영공립수산중학교(지금의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 전신)에 입학했다.
당시 수산학교의 내용이 적성이 맞지 않았으나 아마추어 화가인 일본 선생으로부터 유화 등에 대한 미술의 상식과 함께 미술의 감수성을 개관하는 시기였다.
1933년 통영공립수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진남금융조합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때 그림을 독학하였으며 1937년 부산일보사에서 주최한 제8회 부산미술전람회에 ‘나부습작’을 출품한다.
이 시기 미술의 독학에 대한 애증은 후에 통영을 기반으로 평생을 펼쳐온 전혁림 화백 그만의 고집스런 예술의 삶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독학시기에 일본에서 수입된 서적과 잡지를 구입해 읽었으며,1935년에 일본인 도고 세이지가 강습한 부산의 ‘이과회 하기 양화 강습회’에 일주일동안 참석하여 누드 2점을 그렸다.
이를 계기로 1938년 부산미술전에 유화 ‘신화적 해변’,‘월광’,‘누드’를 출품 입선하여 부산,경남지역의 신진 양화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통영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고, 그즈음 프랑스 유학을 준비 했으나 여러 상황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경남미술연구회에 출품했으며 그의 나이 31세에 통영서 대한민국 광복을 맞이한다.
광복 후 통영여중고 선생이었던 동랑 유치진, 청마 유치환, 윤이상,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와 함께 통영문화예술 창달을 도모하기 위해 통영문화협회(1945년)를 창립한다.
한국전쟁 기에는 부산에 머물며 1952년 부산의 다방 ‘밀다원(密茶苑)’에서 제 1회 개인전을 개최하고, 같은 해 통영의 ‘호심다방’에서 <이중섭,유강렬,장윤성,전혁림-4인전>을 개최한다.
이 당시 전혁림 화백은 이론적으로 탄탄한 손응성,박고석과 어울렸으며 한묵,김환기,이중섭과도 유대관계를 맺어 지방에서 작업하는 작가로서는 하나의 진일보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 부산화단은 서울에서 내려온 화가들의 작품에 지방적인 색채가 사라짐을 실감하고 반성의 기회로 삼았는데 이때 통영의 고집(향토 성)으로의 회귀를 생각하며 한국적인 정서와 지방적인 특색에 대한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39세에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늪’이 특선 및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해 부산 ‘피가로’다방에서 2회 개인전을 개최하고, 대한민술전에 ‘어항의 우후’와 ‘삼면관음’을 출품했다. 50년대 특이할만한 사항 중에 하나는 자의에 의해서 부산 대한 도자기회사 공방에서 도화를 연구한다.
여기서 전혁림 화백은 도자기를 모티프로 채용하여 화면의 구성요소로 삼았던 다른 작가들과 그가 다른 조형의식을 지녔다. 한국적 이미지로서 도자기라는 형태를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 자체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한국적인 미에 접근하는 태도는 전혁림 화백이 민화나 오방색을 한국적 미의 조형요소라는 이유로 사용할 때조차 다른 깊이를 지니게 된다.
전혁림 화백의 미의식은 ‘감각보다는 실질에, 실용적인 미를 추구하는 구축적인 화면으로 나타난다’라고 호평을 받고 있다.
이런 한 소신 있는 작품 세계는 구상과 추상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근간이며 자유로이 대상의 관념에 머물지 않는 작가의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1950년대는 시대의 굴곡이 실험형식의 상황을 이끌어 냈으며 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 미술계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통영에서 꿋꿋한 화업의 길로 정진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중앙에 뚜렷하게 알려졌으며 이때는 예순을 넘어 일흔에 가까운 시기였다.
전혁림 화백은 한 세기를 관통하며 살고 있다.
그의 1962년 ‘부산국제춘추 기고문(안고수저)’라는 자서에서 “나는 명치말년에 이어 대정 3.1 독립운동, 세계 2차 대전,일어상용 창씨개명, 8.15, 6.25, 4.19, 5.16 이런 일들을 겪었고 타고 넘었다” 며 “할 말이나 쓰고 싶은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나간 일들을 그리워하며 반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줄 알지만 나의 연배되는 사람들은 수난이 너무 엄청나고 두려웠다”라고 술회했다.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한 질곡의 시대에 살아온 인생 여정의 세월을 담담히 서술한 이면에는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애가 담겨 있다. 개인의 인고가 담겨있으며 젊은 세대에게는 화가 이전에 통영을 지켜온 큰 어르신으로서 염려도 그려져 있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고,입체와 평면을 활보하는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통일성이 있다.
이는 강렬하게 보이는 색채의 조화이다. 통영의 섬과 바다 하늘을 나타내는 색과 한민족의 오래 시간으로부터 전해온 향토적인 소재(민화에 주로 사용된)인 오방색(청,백,적,황,흑)을 일컫는다.
오방색의 교차되는 사용은 강하고 원색인 색상의 대비로 나타나 신성감이 더해진다.
전혁림 화백은 1994년 어느 전시회장서 “내 작품에는 충무(지금 통영)라는 지역의 고유성이 스며 있겠지만, 이는 우리 한민족의 미의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나는 믿는다”며 “내가 10대부터 관심을 기울었던 민화 같은 것에서도 우리는 폭넓은 공감대를 확인 할 수 있다”라고 전했다.
민화에서 화면의 구성법,색채,시대성등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어떻든 내 그림은 오랫동안 경험을 통해서 걸러내진 내 삶의 총제임을 확실히 밝혔다.
전혁림 화백이 명확히 한 것은 향토적인 색과 통영의 정취임에도 지방적이지 않은 것은 뚜렷한 자기주관이 국적을 가진 한국적이고 이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통영을 기반으로 ‘코발트 블루’를 이끌어낸 통영 풍경화가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갈 이유이다.
청와대 인왕홀에 걸린 '통영항'(전혁림 작 2006년,길이 2m 높이 2.7m)이 청와대를 찾은 외국국빈들에게 가장 먼저 선보여야 할 이유도 일맥상통한다.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이 세계적인 대작임에 틀림없다.
고 노 전 대통령이 외국 순방 때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 등 외국 정치지도자들이 외교현안 논의에 앞서 소장한 그림 자랑부터 하는 ‘문화 마인드‘에 자극받은 것이다.
당시 청와대는 그림 구입에 앞서 2005년 11월 경기도 용인의 이영미술관(관장 김이환,경남 고성 출신)에서 열리는 전혁림 화백의 전시회 '90, 아직은 젊다'를 찾아 ‘통영항’에 감명을 깊게 받았다고 전했다.
현존하는 거장 아흔 다섯의 전혁림 화백은 한 세기를 가로 지르고 있다. 전혁림 화백은 “예술은 굳이 배워서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재주”라고 하였다. 하지만 가지고 태어난 것이 재주뿐이겠는가?
전혁림 화백의 손등은 퍼렇게 물들을 정도로 통영의 바다를 하늘을 그려온 인고의 세월이 있었으며 힘들고 고난 하던 아내와 아이가 그 곁을 묵묵히 지켜온 것이다.
전혁림 화백은 “회화는 이야기에서 발전한 것이며 얍삽하게 물감만 발라 내놓는 그림을 보면 불쾌하다”고 했다. 어른다운 염려이다. “세상 모든 그림을 내가 다 잡아먹었다고 나는 자부하고 있소. 내 그림을 잘 보시오. 불화,성화,입체파,초현실주의 그림도 있소”라고 일갈한다.
한 세기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살아온 자신 만만함의 표현이다.
전혁림 화백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대여 김춘수 시인은 ‘전혁림 화백에게’라는 시를 지었다.
전 화백/당신 얼굴에는/웃니만 하나 남고/당신 부인께서는/위벽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Cobalt Blue./이승의 더없이 살찐/여름 하늘이/당신네 지붕 위에 있었네.
김춘수 시인은 ‘예술이란 혁명도 사회운동도 아닌,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통영이 낳은 두분 모두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해내기 위해 헌신 하신 분들이다.
예술을 위해 눈여겨 볼만한 시선이 있는 전혁림미술관 2층, 청마 유치환과 가까웠던 이영도 시인과 전 화백이 같이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 작은 사진 하나로도 단아했던 이영도와 젊은 전혁림을 볼 수 있는 예술을 위한 지나간 세월이 총집대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청마의 시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그 시를 썼던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은 통영 시내 한복판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지금의 중앙우체국) ‘청마 우체국’으로 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 때 우체국 맞은편 2층집이 정운 이영도 시인의 집이었다.
청마는 이영도 시인의 집 건너편 우체국 창문 앞에서 무려 5천여통의 러브레터를 보냈다.
거진 100년이란 세월을 관통한 전혁림 화백은 당시를 생생히 들려줄, 오로지 유일하게 고집스러게 통영을 지키고 있는 예술계의 대부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선현한 색채를 위해 지금도 물감을 펼쳐놓고 작업실에서 꼿꼿하게 붓질하는 노화가의 눈은 아직도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전혁림 화백은 통영이 낳은 영원한 현역이며 통영을 고집한 영원한 대가이시다.
전혁림 화백 '천수(100세) 기념전' 개최를 넘어 오랫동안 건강하시길 통영의 모든 것이 지켜드릴 것이다.
-전혁림 화백이 걸어온 발자취-
서울문화투데이 인터뷰 경남본부장 김충남 , 촬영/정리 홍경찬 기자 cn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