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Issue]KBS교향악단, ‘국립’ 명칭만큼 중요한 ‘명예’ 지키기
[Hot Issue]KBS교향악단, ‘국립’ 명칭만큼 중요한 ‘명예’ 지키기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2.01.19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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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KBS교향악단 최초 명예 음악감독 취임
박현정 전 대표-서울시향 직원, 법정 공방 ing
사과 없이 사라진 사건 공모자들, 그리고 홀로 남은 피해자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단체인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이하 코심)의 이름에 ‘국립’을 넣는 명칭 변경 추진에 KBS교향악단이 반발하며, 이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1985년 창단된 코심은 국립교향악단이 1981년 해체돼 KBS로 이관된 이후 마지막 상임 지휘자였던 고(故) 홍연택이 함께 사임한 단원들과 만든 오케스트라다. 민간 오케스트라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자 1987년부터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의 공연을 전담, 국고 지원이 늘면서 문체부의 관리ㆍ감독을 받게 된 것이다. 코심은 예산의 약 75%인 60억 원가량을 국비에서 지원받고 있고, 문체부 산하 예술단체 공연에 참여하며 연간 100여 회 무대에 선다.

▲KBS교향악단
▲KBS교향악단

문체부와 코심에 따르면 현재의 이름은 공공 예술 단체라는 정체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수년 전부터 명칭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정부 지원에 문체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단체인 만큼 새 이름에 ‘국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KBS교향악단이 반발하고 나섰다. KBS교향악단 노동조합은 지난 7일 성명을 통해 “KBS교향악단은 명실상부 ‘국립교향악단’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과연 해당 오케스트라가 ‘국립교향악단’ 명성에 어울릴 만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립교향악단’ 명칭 변경 추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KBS교향악단도 12일 입장문을 내고 “특정 오케스트라에 ‘국립’이라는 이름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국립’이라는 이름의 무게와 국격을 고려해 그에 걸맞은 실력과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전했다.

KBS교향악단은 그들이 과거 ‘국립교향악단’을 전신으로 하고 있음을 근거로, ‘국립’ 명칭의 뿌리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클래식계에서는 “국립교향악단이 해체될 때 당시 핵심적인 지휘자와 연주자가 코심을 세운 만큼 자신들만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음악계 원로는 “과연 KBS교향악단은 ‘국립’ 명칭을 주장함에 있어, 국민 앞에 떳떳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KBS교향악단, 최초 계관지휘자로 정명훈 위촉

KBS교향악단은 지난 1일 정명훈을 계관 지휘자로 위촉했다. 계관 지휘자는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오케스트라의 발전에 공헌한 지휘자에게 부여하는 명예직으로, KBS교향악단이 계관 지휘자를 위촉한 것은 처음이다. 

정명훈이 국내 오케스트라에서 계관 지휘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해외에선 음악감독 등으로 오래 인연을 맺은 오케스트라에서 추대된 적이 있다.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2015년)와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2016년)는 정명훈을 명예 음악감독으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2012년)는 수석 객원 지휘자로 추대했다.

정명훈과 KBS교향악단은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 정명훈이 1972년 18세에 국내에서 처음 지휘봉을 잡은 곳이 KBS교향악단이다. 이후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며 KBS교향악단과 종종 호흡을 맞췄던 정명훈은 1998년 1월 상임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악단의 기량과 오디션, 부지휘자 등 지원 문제 등으로 경영진과 단원 양쪽으로 불화를 겪다가 4개월 만에 사퇴했다.

정명훈과 KBS교향악단의 불편했던 관계는 20년이 지난 2018년 8월 정명훈이 다시 지휘봉을 잡으며 청산됐다. 정명훈은 2020년 12월과 지난해 8월 KBS교향악단과 호흡을 맞춘 데 이어 지난해 12월에도 자가격리 면제 취소 조치로 입국하지 못한 피에타리 잉키넨 신임 음악감독을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

사죄 없이 ‘명예’ 되찾는 가해자…잊힌 피해자, 기억될 사건

정명훈이 지난 2015년 12월 30일 마지막 연주를 끝으로 서울시향을 떠난 후, 2년 만에 국내 클래식 무대에 복귀하고 계관 지휘자로 추대되는 동안, 2014년 연일 신문 지면을 도배했던 ‘서울시향 사태’는 잊힌 사건이 됐다. 8년이 지난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왜곡되고, 흐려지고, 심지어는 사라졌다.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는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성생명 전무를 거쳐, 2013년 여성리더십연구원 대표를 지내던 그는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권유로 같은 해 2월 서울시향 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박 전 대표로부터 폭언과 성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탄원서가 접수된 뒤 출처 불명의 호소문까지 유포되면서 떠밀려 서울시향을 떠났다.

호소문을 작성한 서울시향 직원 10명은 그것도 모자라 그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허위내용으로 범벅이 된 고소장을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경찰은 강제추행과 성희롱, 업무방해 등 9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은 ‘손가락 찌르기’ 사건(서울시향 직원이 박 전 대표에게 질책을 받으면서 손가락으로 몸을 찔렸다고 주장한 사건)에 집착해 폭행 혐의로 그를 법정에 세웠지만, 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박현정 전 대표를 고소한 10명의 직원 중 곽 모 씨는 허위 사실로 명예를 훼손한 점이 인정돼 박 전 대표에게 5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다만 고의로 무고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돼 형사책임은 면했다. 아울러 2014년 박 전 대표를 음해한 혐의로 기소된 직원 3명이 7년만인 지난해 6월 직위 해제됐다. 시향은 당초 안건에는 징계안도 포함됐지만, 공소장 등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징계안 처리는 보류했다.

이 가운데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부인 구 씨는 서울시향 직원의 호소문 발표 당시 서울시향 직원에게 직접 보고받고 지시하는 등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확인된 바 있다. 검찰과 경찰에 따르면 구 씨는 정 감독의 비서였던 백 모 과장에게 ‘시나리오를 잘 짜서 진행하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구 씨는 또 박현정 전 대표를 겨냥한 사무국 직원들의 투서 발송, 기사화, 성추행 고소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자신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모두 지우라’는 취지의 지시도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미국 국적인 구 씨는 관련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조사에 불응했고, 기소 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국적이 다른 구 씨에 대한 구속력이 없어 수사를 받지 않아도 사건은 종결된다”라고 말했다.

▲KBS교향악단, 정명훈 계관지휘자 위촉식
▲KBS교향악단, 정명훈 계관지휘자 위촉식

진실이 밝혀진 자리, 피해자만 남았다

정명훈은 ‘서울시향 사태’로 시끄럽던 지난 2015년 12월 말, 서울시향에서의 활동을 마무리 지으며, 단원과 직원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겼다. 그는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 사건을 ‘문명화된 사회에서 용인되는 수준을 넘는 박해’라고 표현했다.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는데 이제 세상은 그 사람들이 개혁을 주도한 전임 사장을 내쫓기 위해 날조한 이야기라고 고소를 당해 조사를 받고, 서울시향 사무실은 습격을 받았고 이 피해자들이 수백 시간 동안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수많은 대질 조사 과정에서 서울시향 직원들의 증언은 수시로 바뀌었고, 그들의 주장은 상당 부분 허위로 드러났으며, 정 감독의 측근까지 사건에 깊이 개입해 조작을 지시한 정황 및 증거가 포착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당사자이자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그는 “한 사람의 거짓말 때문에 서울시향 단원들이 10년 동안 이룩한 업적이 무색해졌다”라며 “거짓과 부패는 추문을 초래하지만, 인간의 고귀함과 진실은 종국에는 승리한다”라고 말했다. 떠나는 순간까지 서울시향 직원들의 몫이었던 거짓과 부패 두둔하고 진실을 외면하며 피해자의 자리마저 빼앗는 모습에, 당시 클래식 팬들은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미투피해자연대 대표인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는 “‘서울시향 사태’는 문화예술계에서 거의 신적 존재로 격상된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예술감독이, 견제 받지 않는 자신의 권력과 권한을 더 늘리기 위해 파렴치한 범죄를 기획해, 성실한 한 시민을 파멸에 이르게 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라 정의하며 “아무리 명망이 높은 예술가라 하더라도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힘없는 시민의 자유와 행복을 짓밟는다면, 예술적 신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명훈은 한국인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 3대 교향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닉을 모두 객원 지휘했고,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에 이어 1989~1994년 파리의 현대적 오페라 극장인 바스티유오페라극장 감독을 지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지휘자, 마에스트로 정명훈과의 만남을 고대하는 국내 팬들은 여전히 많다. KBS교향악단은 “정명훈 계관 지휘자와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중에 있다”라고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공(公)은 공이고 사(私)는 사다. 정명훈은 자신에게 제기된 문제나 의혹 등에 대해 아직 시인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8년 전 그들이 도모했던 대로, 박현정 전 대표는 정상적인 일상을 상실한 채, 여전히 서울시향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경로를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 그것은 가해자들의 진정 어린 사과와 반성 그리고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다. 

엄이도종(掩耳盜鐘). 자기만 듣지 않으면 남도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행동, 또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 얕은수로 남을 속이려 한다는 뜻이다.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공영방송 종사자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 의식, 윤리 규범은 다른 힘들로부터 이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공영방송의 명예는 자신에게 부과된 이 소명 의식과 윤리 규범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KBS교향악단은 공영방송 교향악단으로서 ‘명예’를 지켜나갈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