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일랑 이종상이 걸어온, 한국화의 시간을 돌아보다
[현장스케치] 일랑 이종상이 걸어온, 한국화의 시간을 돌아보다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2.06.13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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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음과 이음》전시, 이종상 화백-제자 대담
이 화백 “한국화에 굉장한 책임의식 갖고 있어”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화의 현황과 전망」 세미나는 지난달 15일인, 스승의 날에 개최됐다. 이날 세미나 개최 전에는 이 화백이 제자들과 대담을 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세미나를 꾸린 사람들은 이 화백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국내 미술계의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 화백이 이끌어왔던 한국화의 자생성과 전통의 현대적 변용에 대한 창작관에 대해 공감하고 이를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이들이 만든 자리인 만큼, 세미나와 대담은 이 화백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꾸려졌다.

▲이종상, 원형상 -일획Ⅱ,130×162cm, 장지에 유탄, 어교, 2003 (사진=동덕아트갤러리 제공)

이철주 교수의 일랑 선생님과의 처음 만난 인연을 시작으로 김선두, 김성희, 이승철교수와의 공개 대담이 이어졌다. 일랑 선생은 제자들과의 대담을 하면서, 본인의 꿈 많던 청년 시절이 떠오르는 것 같다며 감사함을 표했다. 대담 자리에서 이 화백은 서울대학뿐 만 아니라 국내 여러 고등교육 기관에서 남다른 열정으로 후학들을 지도해 온 교육현장에서의 회고를 전했다. 또한,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 미술계와 한국화가 마주하게 된 새로운 고민의 지점을 언급했다.

이 화백은 “근대기 우리 미술은 서구미술 중심의 동질화 속에서 상대적으로 한국화의 정신적 또는 형태적 위상이 매우 위축됐다”라며 “지역적 한계라든지 또는 서양문화의 종속성에 대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개선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47명의 작가가 모여 한국화라는 큰 주제 안에서 자신이 가진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동음과 이음》 전시의 의의를 높게 사며, 작가로서의 다양한 창작관을 살려 나갈 수 있는 전시가 많이 개최되길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대담회에 참석한 일랑 이종상 화백
▲대담회에 참석한 일랑 이종상 화백 ⓒ신빛

‘진경’은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담아내는 것

김선두 중앙대 교수는 1977년도 동산방 갤러리에서 이 화백의 작품을 처음 봤던 때로 질문을 시작했다. 김 교수는 이 화백의 작품이 이제까지 자신이 봐왔던 동양화와 전혀 다른 미감을 지니고 있어서 놀라웠다며, ‘일랑 이종상’에게 ‘진경’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한국화의 자생미학에 대해 올곧은 신념을 지니고 작업을 해 온 이 화백은 자신이 어떻게 동양화를 선택하고 한국화를 시작하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전했다. 이 화백은 일제통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해방된 대한민국의 교육을 받은 세대다. 그는 “내가 속한 세대는 처음으로 ‘가갸거겨’라며 한글을 배운 세대로, 우리보다 한 살 많은 사람들은 일본 히라가나를 배웠다”라고 말했다.

당시 학교의 교육자들은 모두 일제통치 시절에 교육을 받은 이들로, 일제강점기 시절 수업 자료를 분별없이 그냥 사용했다. 이 화백은 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따라, 미술 교과서에 있는 그림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으로 학교 미술 공부를 접했다. 그런데, 교과서에 있는 그림은 일본 국기가 그려진 전투기가 미국기가 그려진 전투기를 폭격해 추락시키는 선전매체와도 같은 그림이었다.

▲대담을 나누고 있는 (좌측부터) 김선두 작가와 이종상 화백
▲대담을 나누고 있는 (좌측부터) 김선두 작가와 이종상 화백 ⓒ신빛

선전적인 그림을 베껴 그리던 시절에, 어느 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학교 수위가 이 화백과 친구들에게 다가왔다. 수위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묻기에, 이 화백은 교과서 속 그림을 보여줬고, 수위는 그것을 따라 그리지 말고 반대로 그리라고 말했다 한다. 일본 전투기가 미국 전투기를 추락시키는 그림을 그리지 말고, 한국 전투기가 일본 전투기를 추락시키는 그림을 그리라고 알려준 것이다.

그 때 이 화백이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수위에게 물었고, 수위는 화단을 쓸던 긴 빗자루로 운동장에 태극기를 그려서 아이들에게 알려줬다. 태극문양과 건곤이감을 하나씩 그려가며, 태극기의 존재를 이 화백에게 처음으로 각인시켜준 것이다.

이 화백은 “일장기를 지우고 태극기를 처음 그린 우리 해방교육 1세대가 잘못된다면, 얼마든지 쉽게 일제 잔재에 젖어들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지금은 사실 일제뿐 아니라, 서구 등의 외래문화와 우리 것이 분별없이 뒤섞여, 어떤 것이 우리 것인지도 찾을 수 없는 시대인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화백은 대학시절 처음부터 동양화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 누군가가 미술을 공부한다하니 무얼 그리냐고 물었고, 이 화백은 아직 장르를 정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때 대화를 나누던 이가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것을 해야지”하는 혼잣말을 했다. 그 말이 이 화백 가슴 속에 깊이 남게 됐다.

▲김선두, 느린풍경-별 헤는 밤, 131×164cm, 장지에 먹, 분채, 2021 (사진=동덕아트갤러리 제공)

이 화백은 진경(眞景)에 사용하는 진(眞)이 사진(寫眞)에 사용하는 진(眞)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초상과 영정이 같다고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초상과 영정은 전혀 다른 것이다. 초상은 사진이나 실제 인물을 앞에 두고 작업을 한다. 하지만 영정은 한 인물의 모든 생애를 다시 돌아가서 함께 살고, 그 인물의 인품이 어떠했는지를 창작자가 다 경험한 뒤에 완성될 수 있는 그림이다. 영정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그림이나 글, 행적을 모두 찾아서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형이 눈앞에 나타나고, 영정은 그 모습을 그리는 일이다. 흔히 무당들이 신접한다고 하는데, 화가도 영정을 작업하기 위해선 무당이 돼야 한다”라며 “진경 역시 같다. 눈앞의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닌, 산수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우리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야 한다”라고 답을 이었다.

이 화백이 그린 대작의 독도 그림 중 한 점은 고등 검찰청에 걸려있다. 이 화백은 독도의 진경을 우리나라 중요기관에 걸어두는 것이 ‘진경’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 독도를 자신의 것이라 우기기 위해, 후지산 옆에 다케시마를 그려 넣은 그림을 세계 곳곳 일본 식당에 걸어두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끊임없이 독도를 말하고, 독도의 그림을 우리나라 중요한 곳에 걸어둔 것을 보고 쉽게 시도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산수를 담은 그림이 아닌, 그림 안에 산수가 가진 정신을 탐구하고 담아내는 것이 진경이다”라며 자신이 지켜온 한국화에 대한 신념과 ‘진경’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세세히 전달했다.

▲대담을 나누는 김성희 학과장과 이종상 화백, 세미나에 참석한 참석자들
▲대담을 나누는 김성희 학과장과 이종상 화백, 세미나에 참석한 참석자들 ⓒ신빛

‘미술’은 ‘통섭의 학문’

김성희 서울대학교 미술대 학과장은 이 화백과의 대담에서, 이 화백이 끊임없이 연구해 온 ‘한국 채색화 재료’를 언급하며, 제자들에게 특별히 재료 기법을 교육한 뜻이 있었는지 물었다. 이에 이 화백은 본디 미술이란, 단순히 그림만을 그리는 것이 아닌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통섭의 예술’이라는 이야기로 답을 시작했다.

이 화백은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보고 ‘환쟁이’라고 낮잡아 부르는 말이 있다. 사실 화가들은 인문학, 시, 과학에 모두 밝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림’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른다고 하는 ‘환쟁이’가 되는 것은 대학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우리 화가들은 발상이 떠오르면 먼저 물건을 잡는 이들이다. 그렇게 때문에 과학을 알아야 한다. 또한 정신을 담아야하기 때문에 인문학 또한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미술 대학에서는 ‘미술’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교수 시절 이 화백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직접 보고, 관찰하고 연구한 뒤 그 가치를 알리고자 대학교에 벽화 학과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고분 벽화가 가진 가치를 후세에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미술대학 교수진은 ‘벽화학과’를 만들면 이 화백만 강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이 화백은 미술대 강의 중 ‘재료기법’ 강의를 만드는 것에서 뜻을 멈춰야 했다.

▲《동음과 이음》 전시장 전경 ⓒ신빛

그는 “고구려 고분 벽화는 ‘음택지(陰宅地)’에서 제작된 벽화로 이는 ‘양택지(陽宅地)’에서 제작되는 벽화와는 다른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물을 맞아도, 전혀 훼손되지 않는 과학기법이 담긴 것이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 벽화다. 학생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었다”라며 “미술대학은 과학을 알아야 하는 학과다. 예를 들어, 납성분과 과산화납 재료가 섞이면 승화돼 기체가 돼버리는 현상들, 그래서 결국 그림을 그린 이와 보는 이가 모두 납중독에 걸리는 그런 상황들을 미술 하는 이라면 알아야 했다”라며 재료와 기법을 아는 것이 작품을 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설명했다.

이 화백은 서울대 미술대 학과장을 맡고 있는 김 교수에게 다시 한 번 미술이 ‘통섭의 학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후대에 자라날 세대가 지금보다 더욱 더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시대를 감각하고 화폭에 그림을 담아낼 수 있길 바란다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고구려벽화 기법, 우리 채색화의 시원(始原)

이승철 동덕여대 교수 역시 이 화백에게 ‘재료기법 강의’를 들은 제자 중 하나였다. 이 화백이 전한 가르침은 이 교수가 작업을 이어나가는 지침이 됐고, 나아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으로도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 화백에게 우리나라가 가진 재료의 특성은 무엇이고, 우리의 재료기법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 화백은 이 교수가 재료기법을 아주 열심히 배웠던 제자라고 말했다. 화학기호도 나오고, 이과적 지식이 많이 필요해서 공부가 어려웠을 텐데 잘 따라와, 이 교수의 이러한 고민도 들을 수 있게 돼 감회가 새롭다고 밝혔다. 이 화백은 우리 재료의 특성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고려불화로 이어진 우리나라 채색화와 이어진다며 답을 전했다.

▲대담을 나누는 이승철 교수와 이종상 화백 ⓒ신빛

해방이후 일본과는 다른, 우리만의 그림을 찾기 위해 한국 미술계는 수묵화와 단색조 작품을 하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색을 입히는 채색은 일본의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일본의 채색화는 일제 때 한국이 일본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는 것이 이 화백의 설명이다. 더불어 일본은 서양문물을 우리나라보다 일찍 받아들이며, 서양 유화 기법을 빠르게 흡수했다. 결국, 우리의 것이었던 채색화가 일본의 것으로 점점 변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음택지(陰宅地)에서 제작된 벽화로 땅을 파고 들어가, 굴 안에서 완성한 것이 특징이다. 이 음택지에서 완성한 벽화의 특징은 바로 ‘방수’다 이 화백은 “고분 안으로 들어가 보면 벽화 위에 눈에 쉽게 띄지 않는 물고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빗물을 벽화에 고르게 내려 보내는 구조 중에 하나다. 이러한 구조로 벽화에 빗물이 계속 흐르는데, 고구려 벽화의 채색은 방수가 되기 때문에 빗물을 코팅제처럼 사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벽화는 천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거나 염료의 합성으로 승화되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고구려 벽화는 채색에 유기질을 쓰지 않고, 무기질을 사용하고, 황금을 사용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한 채색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도 언급했다.

고구려 벽화가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채색 기법은 전 세계 아무 데서도 흉내 내지 못하는 기법이라고 이 화백은 강조했다. 우리 재료의 특성과 발전 지향 역시, 고구려 고분 벽화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이 화백의 답이었다.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화의 현황과 전망」 세미나 단체 사진 ⓒ신빛

이 화백은 “한국화는 문사철(文史哲)에서 이어지는 문인(文人)적 요소를 가진 수묵과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기법을 지니고 있는 채색을 모두 아우른다”라며 “우리의 채색화가 좀 더 빛을 발하게 돼, 수묵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면 우리나라에는 정말 좋은 작가들이 많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며 한국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표했다.

끝으로 그는 회사후소(繪事後素)를 언급하며 “좋은 그림은 좋은 인품으로부터 시작된다. 좋은 그림과 좋은 인품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에 있어서 ‘미술’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통섭의 교육으로 철학을 잘 전달해주길 바란다”라고 이젠 스승이 된 제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