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2) 이강소 작가 "장자의 ‘나비의 꿈’을 현대물리학의 기운생동으로 표현"
[Special Interview](2) 이강소 작가 "장자의 ‘나비의 꿈’을 현대물리학의 기운생동으로 표현"
  • 이우상 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22.11.2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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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서>

젊었을 때부터 상당히 구도적 이었다.

구도적이 아니라 체험적인 느낌이었다. 선배와의 선술집에서 느낀 체험이었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확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작업은 그런 사상에서 계속 이어져 온 것이다.

명동화랑에서 회화작품의 전시가 아니고 대포 집 퍼포먼스를 발표했다. 그 당시 반응이 상당했겠다.

이 작품은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연극인들이 “우리는 이제 끝났다”고 했다고 한다(웃음). 이 작품이 75년 파리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선정이 됐다. 그러나 욕심이 났는지 정작 파리비엔날레에는 다른 작품 ‘닭 작업’을 갖고 갔다. 그때 김창열 선생이 파리에 계셨으니까 운영위원회에 닭 작업으로 바꾸겠다고 요청해 주었다. 닭을 먹이통에 다리를 매서 먹이를 주고, 바닥에 석회가루를 뿌려서 닭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퍼포먼스였다. 닭은 3일 후에 농장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후에는 닭의 발자국 흔적을 찍어 놓은 사진만 전시장에 걸어놨다. 이것을 보고 관객들은 각자 닭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된다.

작가의 의도로 기획된 닭이 아니라 보는 사람 각자의 경험과 개념으로 각자의 닭을 생각하는 구도다. 오프닝 때 관람객들이 보고 깜짝깜짝 놀랐다. 그때만 해도 파리가 근대미술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런 퍼포먼스가 생소했을 것이다. 파리 제2 국영방송에 취재가 되어 스튜디오에 닭과 함께 와서 전시해달라고 하여, 닭과 먹이통을 갖고 가서 전시하고 해설했다.

저녁 9시 골든타임에 방영됐는데, 내가 불어를 못하니까 당시 파리에 체류 중이던 이일 작가가 술 한잔하고 가서 작품설명을 잘 해주었다. 방송 끝나고 김창열 댁에서 이우환을 비롯한 파리에 있는 작가분들이 모여서 간단한 파티를 가졌던 추억이 있다.

그때 김창열은 파리에서 이미 물방울 작업을 했을 때인가?

그렇다. 70년대 아주 섬세한 물방울 작업을 하셨다. 작가로서 아주 안정된 작업을 하였고 그래서 작가들뿐 아니라 파리를 찾는 명사들도 김창열 선생의 안내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파리에 있으면서 한국인들에게 너무 잘하셨다. 나도 파리비엔날레 기간에 신세를 많이 졌지만, 말이 없으면서도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는 분이다. 깊은 정을 가진 분이었다.

▲작업실에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강소 작가

작품 ‘몽유’는 사진작품이다. 사진도 잘 찍으시는 것 같다.

몽유는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는 감정이 강하게 반영됐다. 사진이나 회화나 조각이나 이것들이 어떤 표현의 목적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뭔가 해보고자 접근한 것이다. 조각은 1981년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했는데, 작업의 양도 상당히 많다. 이 조각도 표현으로서가 아니고 현대의 조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사진이라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사진은 내가 다니다 우연히 좋은 장소를 만나면 찍고 있는데, 특히 고가(古家)나 옛날 유적을 만나면 카메라를 들이댄다. 카메라는 빛을 통하고 망점을 통해서 그림이 드러나는데, 그 망점이 생기는 분위기가 참 묘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사진에 접근한다. 조각도 내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던진다. 흙덩이를 던진다. 내 손을 떠나서 조각이 이루어지고 있다. 보통 조각이라면 작가의 의도대로 다듬어지고 있는데, 이 조각들은 다 내 손을 떠나서 이루어지고 있다.

내 나름의 조각의 방법론이랄까, 또는 회화의 방법론, 설치의 방법론, 이런 것이다. 내 모든 작업이 주관적 성정의 표현이기보다는 형식의 구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조각들은 새로이 칼질하거나 그런 건 전혀 없고 던진 그대로 작품이 된 것들이다. 나중에 조각전만 따로 할 계획이 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나?

근간에 창성동에서 2인전을 발표한 적이 있다. 조그마한 10평이 안 되는 한옥갤러리 고가(古家)인데, 권순철 작가 전시를 구경 갔다가 나중에 둘이 전시를 한번 하자고 했다. 권순철은 가장 친한 후배이다.

서울미대 후배인가?

미대도 후배고 고등학교도 후배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종로구 누하동에 화실을 하나 얻었는데, 그곳이 한 묵 선생이 화실로 쓰다 프랑스로 가며 남긴 것이다. 중국집 2층인데 우리 선배가 인수했다가 나에게 넘겨서 아뜨리에로 사용했다. 그때가 5.16 혁명 이후의 시대라 우리 생활이 어려울 때다. 내가 대구 출신이니까 대구와 부산 출신 남학생들이 집결하여 작업도 하며 숙소가 돼버렸다.

권순철도 입학하고 거기서 한 1년 반 지내며 우정을 쌓았다. 요즈음도 그 동네만 가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래서 전시 명을 『가슴이 두근두근』이라고 했다. 나는 창성동에서 설치작업을 했는데, 과거에 찍었던 사진을 확대해서 담벼락과 그 공간에 어울리는 사진을 벽면이 꽉 차게 설치했다. 나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Lee Kang So, From an Island-04013, Oil on Canvas, 145x145cm, 2004 (사진=작가 제공)

사진, 조각뿐 아니라 설치작업까지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고 있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 사진이나 회화나 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회화는 이런 방식이면 어떨까, 조각은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면 가능하지 않은가 하며 제안해 보는 것이다.

나 자신의 표현이기보다는 형식의 제안이다.

조각을 던져서 만든다고 했는데, 이게 회화에서 물감을 뿌린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작업으로 봐도 되나?

그렇다. 잭슨 폴록이 뿌리고 흔적을 날리는데, 그러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의 기운이 작품에 입혀지고 또 그 기운이 작동하면서 관객하고 연결되는 그런 구조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연결돼 있는 구조로서의 회화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사고나 방법, 이런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년에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계획이 있다.

구겐하임과 국립현대미술관이 함께 준비하고 있는데 계획이 잘되고 있는 것 같다. 30년 전인 1991년에 선배들과 ‘테이트 리버풀’에서 『자연과 함께』라는 제목으로 한국현대미술전을 했다.

오늘날에는 런던 테이트가 근현대 미술을 하는데, 당시에 현대미술은 리버풀에서 주로 했다. 정창성, 윤형근, 박서보, 이우환, 김창열 그리고 나, 이렇게 6명이 리버풀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했는데, 한국 현대미술로서는 아주 기념비적인 전시였다. 국제적인 미술관에서의 중요한 전시였다. 그 다음에 이번 구겐하임 전시가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확실한 명단은 아직 공표가 안 됐지만, 아마 70년대 작가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 전시는 70년대 한국의 현대미술을 양국의 시선으로 엄선해서 하는 것이니 그동안의 전시 중 가장 중요한 전시가 아닌가 생각한다. 7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이 중심이 되는데, 70년대 미술이 중요한 것은 근대에서 현대미술로 넘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이강소, From a River 99215,Acrylic on canvas,194x259cm,1999 (사진=작가 제공)

70년대 미술이 요즈음 단색화로 아주 각광을 받는 것 같다.

70년대에는 단색화라는 말이 없었다. 다만 박서보 선생의 이론으로 자신의 작업이 모노크롬이라고 78년경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밖에 한두 분이 모노크롬이라고 신문 지상에서 이야기했고, 그 외에는 이야기한 작가가 없었다. 지금은 젊은 이론가들이 공부도 많이 하며 연구하고 있어서 앞으로는 긍정적으로 기대하지만, 70년대는 냉철하고 명석한 해석이 많지 않았고, 상업적으로 흐르지 않았나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다. 70년대 모노크롬과 관련하여 우리가 뭔가 반성을 하고 분석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감한 문제이지만 감히 말씀드린다.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는가?

그때 행해졌던 작업들을 다시 드러내놓고 뭔가 진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작가들이 다 묻혀버려 안 보인다. 큰일났다. 그 작가들의 다양한 색깔들을 들쳐 내줘야 하는데, 그럴만한 이론가들이 과거에는 없었다.

이론가 숫자가 너무 적었고 그래서 다양한 이론들이 없었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이 퇴색되고 사라지고 그랬다. 70년대는 너무 다양한 작가들이 많았다.

▲이강소 작가가 질문에 답을 전하고 있다
▲이강소 작가가 질문에 답을 전하고 있다

앞으로 중요한 전시계획은?

회화는 작년에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했으니, 앞으로는 「조각에 관하여」 그 다음에는 「회화에 관하여」로 정리를 하고 싶고 또 기회가 온다면 「설치에 관하여」를 생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미술의 방법론에 관한 나의 의견일 뿐이다.

후대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그럴 겨를도 없다..작업하다가 어느 순간에 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밖에 안한다. 이게 좋았으니까, 지금은 작업하는 것 자체가 내 일과이고 나의 행복이다. 어렸을 때 막연하게 작가 하면 해변에서 베레모 쓰고 산책하는 그런 모습을 그렸고, 예술가를 참 멋있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작업 그 자체가 좋다.

 


<에필로그> 

이강소 작가 인터뷰 기사를 마감하며 느끼는 소회는 “특정한 종교도 없는 분이 종교의 심오한 경지를 일상에서 깨닫고, 그의 미술이론으로 승화시키며 화면에서 일필휘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닌다. 꿈에서 깨니, 꿈속의 나비가 실재인가 아니면 지금의 내가 실재인가 하며 가상과 현실을 오르내린다.

장자의 이 「나비의 꿈」이 현대물리학이 증명해가고 있는 방향이라니 작가의 연구가 실로 놀랍다. 실제 앞으로 10년 이내에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오는데 이때가 되면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기술의 발달로,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세상이 온다는 어느 인문학자의 글이 생각난다. (동아일보 2019, 1, 16일 자) 또 이강소는 후배 미술가들에게 관습에 젖어있는 서구미술의 존재론 자체를 벗어나라고 제시한다. 존재론은 우리의 경험 속에 있는 개념일 뿐이니 작가의 개념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는 주관적 미술을 벗어나서, 작가의 정신이 화면 위의 물감이나 붓의 흔적 등 모든 입자와 어울려 기운생동으로 관객에게 전달되는 유기론적 미술을 그는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물리학이 증명하는 동양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과학의 핵심인 양자역학은 인과법칙보다는 우연성을 따르고 있다고 하니, 그의 미술이론이 앞으로 우리 미술이 연구해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세상은 허상이고 진여(眞如)는 따로 있다는 종교의 진리와 또 현대물리학의 발견 그리고 미술가들의 표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의 정신세계를 진리와 빛의 세계로 이끌어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