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소고기를 사 들고 번질나게 드나들며, 어느 주조장과의 힘겨루기. 박재호(3-1)
[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소고기를 사 들고 번질나게 드나들며, 어느 주조장과의 힘겨루기. 박재호(3-1)
  •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
  • 승인 2023.11.2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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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박물관 박재호 관장의 보물섬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예술감독)/문화유산국민신탁 자문위원

전라북도 임실 오수에는 우리나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술 컬렉터가 있다. 추억박물관 박재호 관장이다. 박물관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사람들의 추억을 수집하고 있다. ‘말이 박물관이지 법적인 박물관은 아닙니다. 원래 저는 90년대 초부터 화폐를 수집했습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아껴가며 한 점 한 점 수집한 거라 자식 같았지요. 그러다가 2006년에 1억 5천만 원 상당의 화폐를 모두 도둑맞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욕도 떨어지고 만사가 귀찮아 결국에는 직장도 때려치워 버렸지요.’ 그렇게 그는 한동안 폐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어린 남매를 보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궁여지책으로 동네 초등학교 앞에 자그마한 문방구 하나를 인수했다. 말이 문방구지 학생 수도 별로 없는 학교인 데다 언제부턴가 수업 때 쓰는 문구류를 학교에서 나눠주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있던 학생들의 발길마저 뚝 끊기게 되었다. 겨우 나가는 거라곤 담배와 한 달에 한두 박스 팔릴까 말까 하던 소주 정도였다.

그렇게 근근이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주류회사에서 홍보용 미니어처 소주를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2007년경으로 기억납니다. 술 회사에서 미니어처 바람이 불기 시작했죠. 양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모아 온 터라 미니어처를 가게에 두면 사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요.’

▲추억박물관 내부 전경 ⓒ윤태석
▲추억박물관 내부 전경 ⓒ윤태석

그러던 차에 화폐수집을 같이했던 지인 몇 명이 박재호를 찾아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근대사 자료가 인기라며 화폐는 그만두고 종목을 바꿔 5~60년대 달력, 반공표어나 포스터, 당시 관광기념품, 엽서, 성냥 등 추억이 묻어있는 근대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박재호에게는 술도 인기니 가게를 하면서 관심을 가져보라고 권유하고 떠났다. 가게를 하다 보니 더 오래된 가게와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곳에 가면 간혹 유통기한이 지난 술이 선반 깊숙한 곳에 두터운 먼지를 이불 삼아 천덕꾸러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사장님 저거 제가 살게요.’, ‘그렇지 않아도 버리려던 참인데, 그냥 가져가면 되지 뭔 돈이여. 박 사장님 우리 창고에도 드릴 게 더 많은데.’ 오래된 창고에는 옛날 노트, 잡지, 장난감, 갖가지 학용품,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오란·씨, 써니텐 같은 음료수와 과자 등 팔리지 않고 남은 재고도 많이 남아있었다. 이런 것들까지 챙겨 주면서 어떤 이는 쓰레기를 처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덤으로 얹어주었다. 술을 비롯해 그렇게 얻어온 것들은 차츰 늘어갔고, 미니어처와 그렇게 모인 술은 오래지 않아 쉽게 팔려나가곤 했다.

그러다가 주류회사를 통해 오래된 주류도매상 몇 곳을 소개받게 되었다. 한자리에서 수십 년째 재고 정리도 재 때 하지 않고 영업하는 곳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추억박물관과 박재호 관장
▲추억박물관과 박재호 관장 ⓒ윤태석

‘목돈이 없으니 일단은 어떤 술이 있는지 사진에 담아 돌아옵니다. 이런 술이 있는 데 살 거냐고 컬렉터들에게 사진을 보냅니다. 사겠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지요. 그 후 돈을 마련해 사 오면 즉시 가져가는 방식이었지요. 참 재미있는 시절이었습니다.’ 박재호가 가게를 접게 된 것도, 본격적으로 술 수집가로 나서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박재호는 활동 반경을 주조장으로까지 넓혔다. ‘한때는 3만 병까지 모았습니다. 그 무렵 술만 전문적으로 하는 수집가들이 많이 늘었었지요. 제가 추정컨대 1억 원 이상 투자한 술 수집가가 전국적으로 최소 50명은 될 겁니다.’ 우선 100년쯤 된 주조장을 타겟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때 발견한 곳이 나주의 한 주조장이었다. ‘제가 전국에 어지간한 주조장은 다 돌아봤습니다. 족히 100군데는 넘을 겁니다. 그중 나주 그 주조장이 한두 번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일제 원형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었고 좋은 유물도 정말 많았습니다. 오래된 술도 많았구요.’

▲박재호 관장의 술과 음료 컬렉션
▲박재호 관장의 술과 음료 컬렉션 ⓒ윤태석

박재호는 처음엔 술을 사러 온 것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눈을 의심할 정도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컬렉터들이 너무나 소장하고 싶어 하는 5~60년대 증류주가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6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런 술이 귀한 줄도 모르고 여기저기에 송판으로 짠 옛날 상자 그대로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주조장과는 별개로 본체 앞에 자그마한 돌담 창고가 있었다. 굳게 잠긴 철문 틈으로 살펴보니 거기에는 더 다양한 술들이 먼지에 덮여 궤짝째 쌓여있었다. 이상한 것은 이 주조장 상표가 아닌 술들도 수북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넓디넓은 나주평야에서 농사짓는 사람들로 인해 술 소비가 워낙 많아, 이 주조장이 타지에 있는 대형 주조회사의 대리점도 운영했다고 한다. 일부 회사는 물류비를 아끼기 위해 이 주조장에 완제품을 생산해 달라고 요청해 생산(OEM)까지 했다니. 창고에 더러는 궤짝에 담겨, 일부는 낡은 궤짝을 뚫고 널브러진 술들은 이미 생산이 끊긴 오래된 술들로 엄청나게 귀한 것들이었다.

‘주조장 직원들은 물론 사장까지도 가치를 모른 채 방치되어 있었지요. 그걸 본 순간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 보물섬을 발견한 이의 기분이 그랬을까요?’

<다음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