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소고기를 사 들고 번질나게 드나들며, 어느 주조장과의 힘겨루기. 박재호(3-2)
[윤태석의 컬렉션 비하인드] 소고기를 사 들고 번질나게 드나들며, 어느 주조장과의 힘겨루기. 박재호(3-2)
  •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
  • 승인 2023.12.1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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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소주회사 모략으로 망한 주조장 찾아 공들여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예술감독)/문화유산국민신탁 자문위원
▲윤태석 남평문화주조장 대표(예술감독)/문화유산국민신탁 자문위원

(지난 호에 이어)

주조장 사람들에게는 폐기물이었지만 박재호의 눈에는 주먹만 한 진주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방문은 얼굴을 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임실로 돌아와서도 박재호의 뇌리에는 그 주조장의 오래된 술들로 꽉 차 있었다. 그리하여 틈만 나면 그 주조장을 찾게 되었다. 안면을 트긴 했지만 겨우 빼낼 수 있는 술은 컬렉터들이 선호하는 것이 아닌 자투리 술 몇 병뿐이었다. 박재호의 의도를 안 젊은 주조장 사장은 야속하게도 차츰 폐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략이 필요했다. 그다음부터는 소고기를 사 들고 찾아갔다. 

‘그 사람들! 꽁술은 잘 줘도 딴 건 기대 마슈. 저도 아버지께 들은 얘깁니다만 저희 아버지가 이 고깃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60년대 후반, 대형 소주 회사들의 모략으로 소주에 유해물질이 함유되었다고 신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소주를 만들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 같은 동네 사람들에게조차 주조장을 잘 안 보여줍니다. 나중에 맛본 그 4홉짜리 소주 참 맛났는데 말입니다. 소고기랑 먹으면 딱이었는 데……. 그때 신문에도 대서특필되고 난리 났었다고 하던데.’ 

어느새 단골이 되어버린 주조장 옆 5일 장터에 있던 고깃집 주인이 주조장 쪽을 힐끔 쳐다보며 푸념하듯 말했다. 

양로소주 상표
양로소주 상표

(필자가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니, 1968년 1월 18일 자 동아일보에 이 양조장에서 생산해온 ‘양로 소주’를 비롯해 전남도 내 5개 주조장 5개 브랜드 소주에 인체에 해로운 메탄올이 법정 허용량을 훨씬 초과해 함유되었다는 전남도 위생 당국의 보고를 받은 보사부가 이들을 대상으로 재검정을 해 보고 내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영업정지 등 강력한 행정조치를 취하겠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항간에서는 이 술을 마시면 죽는다는 소문까지 퍼져 결국, 상표등록이 취소되고, 급기야는 폐업하는 주조장까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악에 받친 주조장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술을 틀어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박재호에게는 꼭 필요한 이유가 되었다. 잘못 인쇄된 것을 모른 채 판매된 당시 24센트짜리 미국 우표가 얼마 전 모 경매에서 26억 원이라는 고가에 팔린 것과 같은 컬렉션의 오묘한 법칙과도 같은…….

남평주조장(1970년 초)
남평주조장(1970년 초)

그날도 퇴짜는 맞았지만, 박재호는 내심 안심할 수 있었다. 고깃집 사장의 말은 박재호만 아는 아주 중요한 정보였고, 따라서 그 소주는 한동안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해 졌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주조장의 지울 수 없는 상흔이 소주에 덧씌워져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보석을 누구도 열 수 없는 금고 깊숙한 곳에 넣고 난 후의 안도감 같은 마음으로 임실로 돌아오는 박재호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박재호에게 그 주조장은 멀어져 있었다. 

한편, 술을 모으다 보니 술잔도 따라왔다. 주류회사에서 홍보용으로 돌린 포스터나 보일 듯 말 듯 비키니 차림의 여자 모델이 맥주잔을 들고 야사시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달력도, 병따개와 재떨이도 모여들었다. 옛 잡지에 실린 술 광고가 재미있어 헌책방을 기웃거리게도 되었다.

한번은 전주에 있는 오래된 헌책방에 들렀는데, 옛 책들을 수거해온 한 노인네가 내려놓았던 책을 주섬주섬 다시 손수레에 싣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중고등학교 졸업 앨범이었다. ‘할아버지 왜 다시 실으세요?’, ‘글쎄 앨범은 필요 없다기에. 고물상에나 가서 폐지로 달아 팔아야겠네. 완전히 하루 공쳐부렀네’, ‘이 앨범은 어디서 가져오셨어요?’, ‘어느 학교에서 오라 해서 갔더니 교무실을 정리하면서 나온 거라고 가져가라 해 힘들게 싣고 온 게지.’, ‘할아버지 제가 살게요. 얼마씩 드릴까요?’, ‘아 그래! 폐지값이나 쳐주면 고맙지 뭐.’, ‘제가 한 권에 1,000원씩 쳐 드릴게요.’

주조장 관련 동아일보 기사(1968.01.18)
주조장 관련 동아일보 기사(1968.01.18)

그렇게 해서 앨범도 모으게 되었다. 그 뒤로도 그 할아버지에게서 계속 연락이 왔고, 박재호도 눈에 띄는 대로 앨범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은 앨범이 대략 4만 권은 될 겁니다. 호남권 어지간한 학교의 연도별 졸업 앨범은 거의 다 가지고 있으니깐요.’ 앨범은 부피가 작아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는 대신 무겁기가 이를 데 없어, 한번 이사 가려면 제일 골치 아픈 게 또 앨범이라고 박재호는 말했다. 

한편, 술은 쌓여 갔고 그러면서 안목도 높아져 같은 종류의 술이나 희소성이 떨어지는 술은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냥 쌓아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창고도 비좁았지만 회전할 수 있는 자금에도 한계가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술을 내놓게 되면서 그 걱정이 차츰 사라져갈 무렵, 인터넷을 이용한 술 판매가 전면 금지되는 조치가 당국으로부터 내려졌다.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때는 이미, 좋은 술을 찾기도 어려워졌을 때지만, 판로도 막혀 마냥 술 수집을 늘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