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도천테마파크, '윤이상이여' 영원히!
통영 도천테마파크, '윤이상이여' 영원히!
  • 홍경찬 기자
  • 승인 2010.03.07 20: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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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19일 개관, '상처 입은 용'을 뛰어 넘는 숭고한 예술 혼을 간직한 곳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일인 오는 3월 19일에 맞춰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선생을 기리기 위한 도천테마파크(윤이상 기념관)가 개관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작업에 한창이다.

▲ 도천테마파크가 오는 3월 19일 개관을 목표로 마무리 공정을 진행중이다.
 윤이상 선생의 생가 주변 도천동 148번지 일대에 조성 중인 도천테마파크(윤이상 생가 터, 당시 통영 도천리) 조성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약 80억원이 투입된 윤이상 기념공원은 야외공연이 가능한 음악광장과 관객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프린지홀’, 고인의 유품이 전시되는 ‘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윤이상 선생이 생전에 연주하던 첼로와 유학 때 사용한 여권, 키홀더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작은 태극기 등 유품 148종 412여 점을 전시 준비중에 있다. 한편 지난 3월 3일 인천세관에 잠들어 있던 윤이상 흉상이 통일부 반입이 허용돼 현재 도천테마파크에 자리해 있다.

▲ 3월 19일 개관에 앞서, 윤 정 윤이상평화재단 이사가 유품을 놓을 위치 선정에 심혐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
 윤이상 선생의 유가족이 통영시에 기증한 유품 전시 마무리 작업에 직접 참여, 심혈을 기울이는 윤정(윤이상평화재단, 윤이상 선생 딸)이사도 개관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개관 전인 도천테마파크(윤이상 기념관) 안과 밖을 관람객의 동선이 되어 들여다 보자.
 
 ◆윤이상의 어린시절 음악적 영감

▲ '상처 입은 용' 윤이상

 음악적 영감 1

 아버지는 종종 밤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말 없이 잠자코 배 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다른 어부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인데,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공명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음악적 영감 2

 봄이 되어 물을 댈 때면 개구리 천지입니다. 매일 밤 개구리 소리가 정말 시끄러웠는데 그게 나에게 우는 소리가 아니라 예술적으로 구성된 혼성 합창처럼 들렸습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소리가 거기에 맞춰 화담하고 세 마리째가 가세히면 갑자기 고음,중음,저음의 합창이 일제히 시작되고 또 갑자기 모두 침묵합니다.

 ◆음악적 토양, 통영

▲ 고 윤이상 선생님 실물에 가까이 복원한 흉상이 북측으로 부터 반입, 통일부 허용을 승인받아 통영에 도착했다.
 윤이상은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통영은 풍부한 전통문화로 인해 많은 예술가와 시인들이 꿈꾸며 온 몸으로 예술의 혼을 호흡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열세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연주하며 직접 선율도 써보았다. 자신이 만든 선율이 동네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영화관에서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로서의 첫 꿈을 품게된다.

▲ 윤 정 윤이상평화재단 이사 뒤로 보이는 고 윤이상 선생님 사진.
 ◆음악을 향한 열정과 삶

 1935년 아버지의 뜻으로 일본 오사카시에 있는 상업학교에 진학했으니, 음악원에서 첼로,작곡,음악이론을 배우게 된다. 이때,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돼 모여 사는 지역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온 후 1939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프랑스의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유학한 이케노우치 도모지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간 옥살이를 했다.

 ◆더 큰 세계로 나아가다.

 1948년 1952년 사이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작곡을 했다. 1953년 서울로 이주,여러 대학에 출강하며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5년 피아노 트리오와 현악 4중 1번으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한 윤이상은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39세 나이에 유럽유학을 결심,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동양의 정신을 서양음악에

윤이상 선생이 항상 간직했던 태극기와 여권 그리고 열쇠고리 유품.
 1956년 파리음악원에서 수학 후,1957년에 서베를린 음악대학으로 옮겨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 라인하르트 슈바르츠 쉴링(Reinhardt Schwarzschilling), 요세프 루퍼(Josef Rufer)를 사사했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5 Stucke fur Klavier)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Musik fur sieben Instrumente)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베를린 정착한 윤이상은 오라토리오 '오 연꽃속의 진주여'(om mani padme hum,1964), 관혁안곡 '예악'(Reak, 1966)의 연이은 성공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 고난과 역경

 유럽에서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힌 윤이상은 냉전시대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윤이상은 1969년 죽음에 직면해서도 희극 오페라인 '나비의 미망인'(diewitwe des Schmetterlinge)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뉘른베르크 무대에 올려졌고 31회의 커튼콜을 받을 정도로 큰 호평을 받았다.

▲ 도천테마파크내 야외 공연장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앞으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가난하지만 물질과 정성으로 우리의 인정을 더 넓힐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이 살아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은 항상 시야를 남에게도 돌려 보는것...우리의 아름다웠던 봄풀이 싹틀 때 시냇가에서 우리 식구들의 소요가 생각 나는구려. 이런 즐거운 생활을...내가 작품을 써서 유명하게 되는 것에 지지 않을 만치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 (1958년 1월 17일 서로 떨어져 있던 유학 초기에 선생이 부인 이수자 여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 아버님의 유품이 전시될 유리관을 깨끗이 닦아 내고 있는 장면
 '아버지 방은 천장의 높고 크기는 우경이 방보다 좀 작다. 광선이 잘 들어오고 바깥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다. 아버지는 이방 안에 혼자 있다. 그래서 조용해서 좋다. 심부름하는 아이들도 친절하고 여기 관리들도 친절하다. 우리나라는 지금 참 추운 때다. 영하 13도, 그러니까 베를린에서는 이렇게 추운 날이 없지...그럼, 아버지가 우리 딸 정아에게 정다운 뽀뽀를 담뿍 보내며, 하루 빨리 우리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정아의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1967년 6월 17일 독방 수감생활 중 독일에 남겨두고 온 아들, 딸에게 쓴 첫 편지로 사형이 구형된 상황에서 1심 공판을 기다리며 쓴 것이다.)

▲ 윤 정 이사는 고 윤이상 선생이 늘 그리던 고향 통영항 사진을 베를린 자택에서 옮겨왔다.

예술혼으로 승화하다.

 열악한 환경 속에 건강이 악화된 윤이상은 병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상에서 조차 계속 작곡에 몰두, '영상'(Images)과 '율'(Riul)을 완성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죄르지 리케티 등 200여 명의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구명운동에 힘썻다. 

◆예술혼이 담긴 첼로

 일제치하의 옥살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항 활동은 감시 대상이었고 결국 체포명령이 떨어졌는데 이것을 안 지인이 그의 도피 생활을 도운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놓지 않을 만큼 소중한 첼로는 윤이상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표적인 첼로곡으로는 '활주'(Glissees),첼로 협주곡(Konzert Violoncello und Orchester, 1975/76),일곱 개의 연습곡(Sieben Etuden fur Violoncello solo,1993) 등이다.

▲ 윤이상 선생은 첼로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화합의 세계를 열다.

 그는 언제나 음악을 통해 평화를 기원했다. 정치적 상황 속에서 1971년 서독으로 귀화했으나, 조국통일 범민족 연합(범민련)의 유럽본주의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다. 1987년에는 삼팔선에서 남북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정부에 건의하여 1990년 10월 서울 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분단 45년 만에 열리기에 이르렀다.

 그 후,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민주화를 외치다 스러져간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교향시 '화염 속의 천사 및 에필로그'(Engel in Flammen,1994)를 작곡했다.

  마지막 작품이 된 이 곡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 받아 독일괴테문화원이 수상하는 괴테상을 받았다.

 ◆윤이상 음악을 말하다.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통일을 기다리는 염원으로 가득했다.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한 후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완성하게 된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작품을 완성 후 윤이상은 이런 설명을 했다.

 "나는 이 교성곡(칸타타)을 1987년 2월과 3월, 2개월 동안에 완성했다. 언젠가 한번은 민족을 위한,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안겨질 곡을 쓰고 싶었다. 이 곡은 나의 양심에서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온 곡이다. '광주여 영원히!'와 함께 나는 작곡가로서 우리 민족에게 바치는 나의 절절한 호소와 충정을 표시한 것이다.

 우리 땅은 우리 민족의 주인이다. 우리의 땅은 아무도 침벌할 수 없고 이 땅에 사는 민족은 갈라질 수 없다.
우리의 역사가 가르쳐준 쓰라린 교훈은 우리 민족에게 강렬한 자활의식을 심어준 것이다. 단합,화해,자주,평등,평화 이런 귀중한 요소들이 우리 민족 앞에 주어진 지대한 과업이고 목표이며, 그 때문에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라고 호소형으로 표현했다"

 음악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승화 시키고 남과 북을 이으려고 노력했던 윤이상,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마음은 음악으로 통일을 염원했으며 화합의 세계로 문을 열었다.

 나의 음악은...

▲ 나의 음악은...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 놓을 뿐입니다.
동양의 예술가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지은 작품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술이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 모티브가 됐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픈 물색
 가끔 파도가 칠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네게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고향의 풍광소리가 그의 음악을 키웠고 많은 영감을 받은 윤이상은 민족음악가로의 위상을 높였으며,
음악을 통해 동서양을 잇고 분단과 삶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예술가이다.

 그는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페렴으로 별세했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됐던 동베를린 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해석 됐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다.

 그가 남긴 150여 곡에는 삶의 열정과 정의로운 예술가로서의 신념이 가득하다.
천재 음악가 윤이상, 그는 시대를 뛰어넘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던 음악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 혼 여정

1917년 9월 17일 통영에서 태어남
1933년 바이올린 주자 최호영에게 2년간 음악 배움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2년간 수학
1937년 귀국 후 통영 화양초등학교서(통영시 산양읍,지금은 폐교) 음악교사로 첫 재직
1939년 일본 도쿄 음악원에서 이케노우치 도모지로 사사

1944년 통영 청년들과 반일 활동으로 두 달 간 옥고
1945년 광복 후 '통영문화협회' 활동
1948~ 1952년 통영여자고등학교,부산고등학교,부산사범학교 음악교사
1950년 1월 부산사범학교 국어교사 이수자와 결혼 부산에서 가곡집 '달무리' 출판. 11월 첫딸 정 출생
1953년 6.25 후 서울로 이주, 여러 대학에서 작곡 가르침.
1954년 1월 아들 우경 출생
1955년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6년 프랑스 유학
1957년 7월 서베를린 음악대학 졸업.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초연.

1963년 강서고분 방문.
1967년 동베를 사건으로 부인과 함께 기소, 1심에서 무기형 선고(부인은 5년형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
1968년 3월 13일 2심에서 15년 감형, 그해 12월 5일 3심에서 10년형으로 다시 감형. 교도소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완성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 6월 서독 키일 시 문화상 수상

1972년 서베를린 음악대학 교수. 8월 뮌헨 올림픽 개막 오페라 '심청' 초연.
1974년 서베를린 예술원 예술회원으로 추대
1977년 한국 민주민족 통일 해외연합 유럽본부 의장으로 선출, 독일 피셔출판에서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집 '상처 입은 용' 출판

1982년 평양에서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면서 해마다 윤이상 음악제 개최. 9월 7회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 공연
1984년 5월 베를린 필하모니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교향곡 1번 초연 이후 해마다 교향곡 1곡씩 발표(총5곡) '평양 윤이상 음악연구소'개관
1988년 도쿄에서 휴전선상 '민족합동음악축전'을 남북에 정식 제안, 5월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수상

1990년 분단 45년 만에 남북통일음악제
1992년 12월 함부르크자유예술원의 공로상 수상 일본에서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출판, 독일 뮌헨 텍스트 크리틱사에서 '윤이상,시대의 작곡가' 발간
1995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상 수상, 11월 3일 베를린에서 영면.

 윤이상 선생의 수많은 작품.

A. 오페라

-'류퉁의 꿈' (1965)  -'나비의 미망인' (1967/68) -'요정의 사랑 (1969/70) -'심청' (1971/72) -'꿈틀' (류퉁의 꿈', '나비의 미망인')(1967/68)

 b. 합창곡

-'사선에서' (1975) -혼성합창곡 '주는 나의 목자시니'(1981) -'현자'(1977)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에필로그'교향시(화염속의 천사)에 붙여(1994)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1986/87)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오 빛이여'(1981) -'독창,합창,관현악을 위한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
-'혼성합창곡 '도(道)에서'(1972/82)

 c. 유반주 독창곡

-기타,타악기,목소리를 위한 '가곡'(1972)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4) -세명의 소프라노와 관혁악을 위한 '나모'(1971) -한 명의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니모'(1975) -알토 독창과 실내 관혁악을 위한 '무당의 노래'(1969/70) -소프라노와 실내 앙상블을 위한 '밤이여 나뉘어라'(1980)

 d. 관현악곡

-관현악곡 '바라' (1960)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차적 음향' (1961) -대관현악을 위한 '차원' (1971)
-교향시 '화염속의 천사'와 '에필로그'(1994)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1981) -관혁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1979) -관현악을 위한 '유동' (1964) -관악기,하프,타악기를 위한 '조화'(1974) -소관현악을 위한 '인상'(1986) -실내교향곡 1번 Kammersinfonie i (1987) -실내교향곡 2번 '자유에의 헌정' '자유의 희생자들에게'(1989) -대관현악을 위한 '윤곽' (1989)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음형들' (1972) -'무악'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적 환상(1978) -관악기,타악기,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1986) -대관현악을 위한 '서곡' (1973/1974)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 (1966) -관현악을 위한 전설 '신라'(1992) -교향곡 1번 (전 4악장) (1983)
-교향곡 2번 (전 3악장) (1984) -교향곡 3번 (단악장) (1985) -교향곡 4번 -'암흑 속에서 노래하다'(전 2악장)
-대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5번 (1987) -대관현악을 위한 '교향악적 정경' (1960)

e. 기악협주곡

-'견우와 직녀 이야기' 오보에,하프,소관현악을 위한 2중협주곡(1977) -오보에,첼로,현악기를 위한 '2중협주곡'(1987)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공후'(1984) -플루트와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77)
-클라리넷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81) -오보에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90)
-바이올린협주곡 1번 (3악장)(1981) -바이올린협주곡 2번 (1983/86) -바이올린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3번 (1992)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975/76)

 f.실내앙상블

-열 개의 악기를 위한 '거리'(1988) -실내협주곡 1번 (1990) -실내협주곡 2번 (1990)
-실내 앙상블을 위한 '낙양'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파곳,호른,바이올린,첼로)(1959) -클라리넷,파곳,호른,현악5중주를 위한 8중주(1978) -실내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단편'(1976)

 g. 실내악

-두 대의 오보에, 두 대의 클라리넷, 두 대의 호른 그리고 두 대의 파곳을 위한 목관8중주(1993)
-목관5중주(3악장)(1991) -아코디언과 현악 4중주를 위한 '소협주곡'(1983) -두 대의 비올라를 위한 '내성'(1988)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 (1976) -첼로와 하프를 위한 2중주 (1984)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공간 i'(1993) -첼로,하프 그리고 오보에를 위한 '공간 ii'(1993) -목관5중주를 위한 '축제적 무곡'(1988)
-기타,타악기,목소리를 위한 '가곡'(1972) -목소리와 하프를 위한 '가곡'(1985)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1963)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1963) -플루트,오보에,바이올린,첼로를 위한 '영상'(1968)
-첼로와 아코디온을 위한 '간주곡'(1988) -두 대의 오보에를 위한 '인벤션'(1983) -두 대의 플루트를 위한 '인벤션'(1983/84)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1964)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노벨레테'(1980)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i,ii(1994) -플루트와 바이올린 위한 '환상적 단편'베이스는 자유롭게 추가(1988)
-플루트 4중주(1986) -플루트,바이올린,첼로,피아노를 위한 4중주(1988) -오보에,바이올린,비올라,첼로를 위한 4중주 (1994) -호른,트럼펫,트롬본,피아노를 위한 4중주(1992) -플루트와 현악 4중주를 위한 5중주(1986)
-클라리넷과 현악4중주를 위한 5중주(1984) -클라리넷과 현악4중주를 위한 5중주 2(1994) -클라리넷,하프,첼로를 위한 '재회'(1986)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1968)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을 위한 '론델'(1975)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외침'(1989) -오보에,하프,비올라를 위한 소나타(1979)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91)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나'(1983)

 h.기악독주곡

-블록 플루트 독주를 위한 '중국의 그림'(1993) -플루트 독주를 위한 '연습곡'91974) -오르간을 위한 '단편'(1975)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첼로 독주를 위한 '활주'(1970) -하프 독주를 위한 '균형을 위하여'(1987) -파이노를 위한 '간주곡 A(1982)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 -'대비':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두 개의 소품(1987) -'리나가 정원에서':바이올린을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84)/85) -베이스 클라리넷을 위한 '독백'(1983) -파곳 독주를 위한 '독백'(1983/84)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1971) -알토 플루트를 위한 '솔로몬'(1977/78)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1966) -첼로를 위한 7개의 '연습곡'(1994) -플루트 독주를 위한 '소리'(1988)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1967)

서울문화투데이 경남본부 홍경찬 기자 cn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