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트 블루의 영면', 통영바다로 돌아가다
'코발트 블루의 영면', 통영바다로 돌아가다
  • 홍경찬 기자
  • 승인 2010.06.0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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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화성 전혁림 , 화필 내려놓으시고 부디 영면하소서

[서울문화투데이 경남본부=홍경찬 기자] "푸르고 아름다운 통영바다를 원고지에 옮기면 유치환의 시가 되고, 오선지에 옮기면 윤이상의 음악이 되고, 화폭에 담으면 전혁림의 그림이 된다고 했습니다."

▲ 전혁림미술관을 들러 작품과 작업실 침실을 돌아본 후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있다.
  '신라와 고려 솔거 담징이 화현 하셨으니 부다 사바에 다시 오려기도 합니다','전혁림 화백님의 아름다운 영면을 기억하겠습니다','통영의 얼굴,한국의 얼굴,세계의 얼굴 고이 잠드소서'

 '전혁림 화백님 이름 하나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이제 하늘나라서 지인들 만나 편히 쉬십시오.' 이는 영결식장과 장례식장에 각각 마련된 방명록이 무려 8권씩이나 쓰이며 조문객이 고인을 기리며 남긴 글들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한국 화단의 전설, 故 전혁림 화성이 화필을 내려놓으며 영면에 드셨다. 지난 5월 25일 오후 6시 50분 향년 96세로 타계, 5일장인 통영예술인장으로 지난 29일 문화마당 강구안서 영결식이 엄수됐다.

▲ 통영예술인장으로 치뤄진 故 전혁림 화성 영결식에 남해안 별신굿 진혼굿이 열리고 있다.
 故 전혁림 화성(1915.9.17(음)~2010.5.25)은 세상의 모든 색을 흡수한 한국 화단의 전설이다. 서민의 애환을 담아낸 민속 문양과 오방색을 기본으로 통영사람의 독특한 외길 고집, 통영바다 빛 코발트 블루와 강렬한 원색을 구사하며 구상과 추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든 대가였다.

 한국현대사의 격동기(일제시대,한국전쟁등)를 거쳐 동랑 유치진, 청마 유치환, 윤이상,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등 통영이 배출한 문화 대가들과 함께 한글강습회를 여는 등 한 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1세대 예술인이 마지막으로 영면하신 것이다.

 통영 강구안 문화마당 영결식은 전국 경향 각지서 모인 500여 명의 조문객이 고인을 추모했다. 이날 강수성 통영문인협회장은 오광수(미술평론가)의 화평을 인용하며 "통영을 이야기할 때 그 어떤 예술보다도 한 장의 전혁림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생각된다"며 애절한 조시를 영전에 바쳤다.

▲ 정해룡 통영예총회장,송인식 동서화랑 대표,김이환 이영미술관 관장,박은주 경남도립미술관 관장 (왼쪽부터)
 정해룡 통영예총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모두 중앙 화단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안달이 나도 선생님은 '중앙'과의 거리를 두고 미술계의 고질적 폐단인 학연 등에 연연하지도, 일시적인 유행에 타협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고향서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풍경을 노래해 왔습니다."라며 오롯이 예술혼을 위해 화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오방색 물감이 묻은 신발을 벗지 않으셨던 거목의 부재를 슬퍼했다.

 1945년 광복 후 미륵산 어귀서 담은 사진 한장에 역사로 남았던 통영문화예술 창달에 헌신한 "통영문화협회 회장이셨던 청마 유치환도 만나시고 총무 대여 김춘수와 간사이셨던 윤이상도 만나시고 초정 김상옥도, 김용주도, 특히 이중섭과도 만나서 못다 한 예술을 노래하고 이야기 하십시오."라며 통영 예술 1세대이자 대한민국 예술 1세대의 천상에서 만남을 기원했다.

▲ 정해룡 통영예총 회장의 추도사
 김이환(경기도 수원 이영미술관)관장은 김형오 국회의장 조사 대독을 통해 "선생님의 마지막 나들이는 지난 4월 28일 서울 인사아트센터서 열렸던 '전혁림 ·전영근, 아버지와 아들 동행 53년' 부자 초대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의 손을 맞잡았을 때 왠지 손아귀 힘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도록에 해주신 친필 사인에는 여전히 힘이 살아있어 이렇게나 빨리 붓을 놓으시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날 휠체어에 앉아계신 선생님 무릎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습니다. 왠지 마음이 짠해진 제가 휠체어를 밀어 드리고, 담요를 가지런히 해드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선생님 옷에 늘 옅게 배어 있던 물감 냄새와 함께 그리움이 가슴 가득 밀물져옵니다. 통영 바다를 요처럼 깔고 통영 하늘을 이불처럼 덮고 편안하게 누우신 선생님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라며 거장의 영면에 절절한 사연을 담아 극진한 예우 갖춘 조사엔 생전 100세 기념전을 성대히 열어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음에 슬퍼했다.

  이에 지난 2005년 ‘구십, 아직은 젊다’ 초대전을 열었던 김이환 관장은 20여 년간 맺어온 인연을 절절히 마음에 담은 김형오 국회의장 조사를 대신 낭독한 후 그의 추도사를 감정에 북받쳐 오른 듯 흐느끼며 전했다. 

▲ 유가족인 전영근 화백과 정정순 여사
 김 관장은 “사모님(故 정명연 여사)의 대한 그리운 정에 못 잊어서, 사모님 돌아가신 후 수염을 깎으시지 않으시고 면도도 안하시고 기르신 그 깊은 뜻을 기립니다”며 목이 메이는 듯 눈물을 애써 감추며 낭독했다.

 늦봄날의 화창한 날씨가 통영 하늘과 바다 코발트 블루빛에 녹아내린듯한 영결식장 풍광은 김 관장의 故 전혁림 화성과 나눴던 담소를 글귀에 담아 “내 그림속에 청마의 시가, 김춘수의 시가, 초정의 시가 흐르고 있고 윤이상의 바다 뱃전의 노래 곡조가 숨쉬고 있노라고 자네들 먼저 다 보내놓고 마지막 남아 내 그림속에  남았네 내 그림속에 자네들 먼저 다 보내놓고 왔노라”고 자랑스레 들려준 작품 면면에 들어간 예향 통영의 자부심을 울먹이듯 생생하게 되살려 추모객의 심금을 또 한번 울렸다.
▲ 통영예술인장으로 치뤄진 영결식장에서 남해안 별신굿인 진혼굿이 열렸다.
 이군현 국회의원은 추도사에서 "비록 몸은 떠나셨지만 선생님께서 남긴 고귀한 예술의 혼을 우리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서호시장을 옆에 끼고, 여객선터미널 앞 해안도로를 운구행렬이 서행하며 호수마냥 잔잔한 통영 강구안 문화마당 바다가 보이는 동충을 돌아 문화마당서 치른 영결식이 엄수됐다.

 이어 운구 행렬은 엄숙하고 느리게 시민들의 애도와 남망산과 갈매기와 5월의 햇살을 받으며 고인이 화폭에 담았던 통영 8대 야경인 운하교를 거쳐 미륵산 자락 봉평동 전혁림미술관을 들린 후 용화사 광장서 노제를 치뤘다.

▲ 영결식이 거행되는 강구안 문화마당
 故 전혁림 화성의 영정을 조심스레 든 손자 강인이 미술관의 작품과 작업실과 침실을 돌아 나오면서 아들 전영근 화백이 지극한 효심으로 헌정한 전혁림미술관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장지인 산양읍 풍화리, 한려수도 바다를 품에 안은듯 고요히 굽이쳐 흐르는 고즈넉한 양화마을로 도착한 운구는 김홍종(통영오광대 보존회)회장의 트렘펫 진혼곡을 들으며 유가족과 문화예술계 저명인사가 지켜보면서 하관됐다.

 매실나무를 직접 심고 풀 한포기에도 고인의 손길이 깃든 옛 작업실 앞마당이다. 본지와 대를 이어 화업에 정진하는 전영근 화백이 인터뷰를 가졌던 작업실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 선정된 곳이다. 

▲ 장지인 산양읍 양화마을로 문화예술인들과 언론인이 운구를 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서울로 출발하자며 아들을 보채시던 故 전혁림 화성은 오랜만에 해후한 지인과 원없이 수인사를 주고 받으며 형형한 눈빛으로 만나던 그날. 인사동서 청진동 해장국과 덕유산 자락 우동국물 맛도 음미했던 '아버지와 아들 동행 53년' 부자전(서울문화투데이 주관ㆍ주최)은 생애(96세) 마지막 초대전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며느리인 정정순 여사, 전혁림미술관 1층 침실에서 주무시는 시아버지(故 전혁림 화성)께서 기침하실까봐 조심스레 방바닥에 베게없이 귀를 대고 잠을 청한 날이 부지기수. 십수년을 효심으로 지낸 이젠 베게가 없이도 잠이 드는 자부.

 묵묵히 통영 예술혼과 동행할 전영근 화백 곁에는 故 전혁림 화성을 영원히 추모하는 문화예술인과 아버지 전영근 화백을 따라 발걸음을 맞출 아들 강인ㆍ상영이가 있다.